예부터 국밥은 지역의 특성과 개성을 담아 발전해 왔다. 전주에서는 '콩나물 국밥'이 사랑 받아 왔고, 부산에는 돼지국밥, 대구는 따로국밥, 나주는 곰탕, 옥천 올갱이국밥 그리고 안성은 장터국밥의 대명사로 알려진 안성국밥이 있다.
지금의 안성 장터국밥을 만든 원조집이 바로 '안일옥(安一屋)'이다. '안일옥'은 한국에서 다섯 번째, 경기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한식당이다.<농림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이 펴낸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자료 중>
◇ 가마솥에 불 지핀 역사를 되집어서
경기도 안성은 조선시대에 개성, 수원과 함께 3대 우시장으로 유명했다. 안성우시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쇠전거리'라 불렸는데 1920년대 초, 故 이성례(김종열 사장의 친할머니) 할머니는 쇠전거리 한 귀퉁이에 작은 가마솥 하나를 걸어놓고 국밥을 팔았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고 3남 3녀와 함께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당시 여성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고육지책이었다. 우시장에서 나오는 소뼈와 내장, 부산물 등을 넣고 푹 끓여 밥을 말아낸 것이 안성장터국밥의 시초다.
'안일옥'을 키운 사람은 김종열 사장의 어머니 故 이양귀비 할머니다. 그 시절엔 다들 그랬듯이 충남 조치원에서 남편 얼굴도 못 보고 19살에 안성국밥집으로 시집을 왔고 시어머니를 도와 장터에서 국밥을 말다가 자연스럽게 2대로 이어받았다. 이름처럼 얼굴도 곱고 심성도 고와 손님들 사이에서도 '양귀비 할머니'로 통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안성 구사거리에 정식으로 가게를 내고 '안성에서 제일 편안한 집'이라는 뜻을 담은 '안일옥'이라는 간판을 단 이도 바로 양귀비 할머니다.
원래 '안일옥'의 3대는 3남 6녀 중 장남(김종선)의 몫이었지만 1980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축구선수였던 김종선 씨는 국가대표로 태극마크까지 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둘째 아들인 김종안 씨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이후 '안일옥'은 인근 도시에 직영점 5개를 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사촌 동생의 빚보증을 서준 게 잘못이었다. '안일옥' 본점까지 날릴 판이었다.
◇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다
9남매를 낳아 키우면서 지금의 '안일옥'을 일궈 낸 양귀비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김종열 사장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딱 하나다. 앞치마를 두르고 국자를 들고 가마솥 앞에 서 계신 모습.
어머니는 해산 당일까지 국밥을 말았다. 산통이 느껴지면 그제야 집으로 기듯 들어가서 애를 낳고 다음 날 바로 식당에 나와 국밥을 마는 나날이 연속이었다. 몸조리는 고사하고 몸을 추스를 여유도 없었으니 자신을 위해서 미역국을 끓였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자식 아홉을 낳아 키웠다. 그런 어머니가 자식들에게는 천하장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더 있는지 물어보자 김종열 사장은 사뭇 진지하게 내뱉는다.
"어머니에겐 분 냄새가 아니라 늘 파 냄새가 났습니다."
파 냄새를 품은 양귀비 할머니는 평생 몇 개의 파를 썰었을까?
"기본 국물은 같습니다. 곁들이는 고기만 다를 뿐이죠. 예전에는 별 구분 없이 그냥 우탕(牛湯)이라고 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팔고 싶은데, 손님들 취향과 추억이 제각각이니 어쩔 수가 없어요. 똑같은 우탕을 누구는 설렁탕으로, 누구는 곰탕으로 기억하거든요."
어렵던 시절에는 찬밥을 싸 가지고 와서 국만 달라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돈이 없으니 밥을 반만 말아 달라는 손님도 있었다고 한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음식을 주고 돈은 주는 대로 받았다니 양귀비 할머니는 정말 마음도 비단결처럼 고우셨던 모양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안일옥'에는 정해진 값이나 상차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춥고 배고파서 이곳을 찾는 손님보다 추억이나 명성 때문에 찾는 손님이 더 많을 것이다. '안일옥'은 그냥 음식점이 아니라 백년 식당의 반열에 올랐으니까.
김종열 사장이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가마솥 불부터 올린다. 센 불, 중간 불, 약한 불로 바꿔가면서 17시간 동안 끓여낸 사골 국물은 다음날이 되서야 손님상에 오르게 된다.
'안일옥'은 장터국밥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메뉴판 가장 윗줄에는 '설렁탕'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처음 가는 가게에서는 맨 윗줄의 메뉴를 주문하는 편이다. 그 식당의 대표메뉴라는 의미니까.
이곳의 설렁탕은 잡내가 없고 고소했다. 심지어 탕이 식었는데도 그 맛이 유지되고 있었다. 100년을 이어온 맛의 비결은 뭘까? 김종열 사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같은 대답일 거라고 한다.
"어머니 말씀대로 하는 게 전부입니다. 첫째, 식재료 살 때 외상 달지 말아라. 그래야 좋은 물건 들인다. 둘째, 냉장고는 늘 채워 놓아라. 그래야 손이 커진다."
좋은 음식을 푸짐하게 내라는 말이다. 이러면 오지 않을 손님이 어디 있을까. 누구라도 '안일옥'을 찾은 손님은 배불리 먹고 나가는 것, 그게 '안일옥'의 밥장사 정신이다.
김종열 사장이 마는 국밥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국밥과 같은 맛일까?
대를 이어오고 있는 여느 식당과 마찬가지로 '안일옥' 역시 특별한 레시피가 없단다. 다만 태어나서부터 줄 곧 본대로, 배운 대로 알고 있는 맛 그대로 만들고 있으니 그 맛이 유지되고 있다고 믿는다.
대를 잇는 음식은 왜 그들의 자녀가 또 그 자녀의 자녀가 대를 이어야 하는지 답이 보인다. 타고난 음식 솜씨와 절대 미각으로 무장한 이들도 자손의 핏속에 흐르는 DNA를 따라 잡을 수는 없을 테니까.
◇ 부부는 더 이상 외도하지 않는다
김종렬 사장은 2002~2006년 안성 시의원을 지냈다. 솔직히 나는 적잖게 실망스러웠다. '안일옥'이란 이름을 지키기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향으로 달려 온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정치라니. 김종열 사장은 그것을 '외도'라고 표현했다. 그가 정치판에 뛰어든 이유가 궁금했다.
"고향에 와서 보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님이 그동안 식당만 했던 게 아니었더라고요."
밥으로 오랫동안 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라고 여기고 그냥 따라했다. '안일옥'이란 명성에 대를 이어 봉사를 하고 있으니 출마 권유를 받는 게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권유를 받고 시의원에 나갔는데, 애석하게도(?) 그해 바로 당선이 돼버렸다.
"주인이 딴 짓을 하고 다니니 식당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죠."
'안일옥'에 위기가 찾아왔다. 주인 없는 식당이 잘 될 리 만무했다. '맛이 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으로 머리통을 맞은 기분이었다. 재출마 권유도 많았지만 나랏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안일옥'이 위험했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 보니 정말음식 맛이 변해 있었고, 가게는 많이 위축돼 있었다. 그런데 딴 짓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홈쇼핑과 가맹점 권유를 받은 것.
"위축된 안일옥이 다시 성장할 수 기회라고 생각했죠."
그 계획에 제동을 걸어준 이는 그가 정치의 달콤함에 빠져있을 때 남편 대신 묵묵히 이곳을 지켜온 아내였다.
"안성국밥은 안일옥에 와서 먹어야 제대로죠. 아무데서나 먹는 안성국밥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대량판매도, 가맹점도 안성국밥의 맛을 제대로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남편이 시의원하다고 밖으로 돌 때 가마솥 옆을 지킨 아내는 홀로 국밥을 말면서 진짜 '안일옥'의 며느리가 돼 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종열 사장의 아내 우미경씨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다. 시댁이 국밥집이었지만 막내며느리인 자신이 국밥을 말게 될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직장생활 잘하던 남편이 별안간 다 정리하고 안성에 내려가서 국밥장사를 해야겠다고 하는데 우미경씨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던 거죠(웃음).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안 온다고 했을 거예요."
시댁이었던 '안일옥'을 10년 이상 주말마다 드나들었으니 국밥집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건 당연할 터, 하지만 카운터나 보고 바쁠 때 홀 서빙이나 하면 되는 줄 알았으니, 장사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서너 식구 살림이나 하던 우미경 씨가 국밥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저희는 김치는 겉절이로 매일 두 번 만들고 깍두기는 일주일에 두 번 담그죠."
김치는 겉절이로 내고 깍두기는 적당히 숙성된 걸 낸다는 얘긴데 매일 겉절이 두 번 매주 깍두기 두 번을 담근다니 말만 들어도 현기증 날 얘기 아닌가?
김종열 사장 부부가 '안일옥'을 이어받았을 당시, 양귀비 할머니는 파킨슨병으로 몸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매일 가게에 나오긴 했지만 일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며느리가 당신처럼 일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요리와도, 노동과도 거리가 멀었던 며느리가 평생 장사만 해 온 시어머니를 흉내 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다른 일로는 잔소리하는 법이 없으셨죠. 그런데 가게 일로는 늘 마땅찮아 하셨어요. 저로서는 한다고 하는데도... 어머님처럼 하기는 힘들었어요."
시어머니는 모든 걸 당신이 해온 방식대로 해주길 바라셨다. 음식에 정성을 다하라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단골손님의 취향 하나하나를 다 꿰고 계셨던 시어머니는, 저 분은 파를 안 드시니 파를 빼라, 그 분은 묵은 지를 좋아하시니 겉절이 대신 신 김치를 내드려라 등등 손님 한 사람 한 사람 다 맞춰 드리라는 주문도 했다.
장사 초보인 우미경씨에게는 단지 힘든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힘들다, 못하겠다는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하게 식당일을 배워나갔다.
◇ 다음 100년을 위하여
'안일옥'은 오픈한 지 올해 96년째다. 4년 후 100주년을 맞는다.
"한 때는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되니 제 마음대로 그만두지 못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지금 김종열 사장은 '안일옥' 100년사를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쓰던 물건들과 신문, 잡지 기사, 손님들이 보낸 편지 등을 꼼꼼하게 모아두고 있다. 잘 정리하면 '안일옥'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밥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리란 기대도 한다.
"제가 못하면 아들 녀석에게라도 시킬 겁니다.(웃음)"
김종열 사장의 외아들은 요리를 전공하고 외국 호텔의 조리사로 활동 중이다.
"저는 요리사가 아니라 어머니가 해 오신 음식을 그대로 지키는 일밖에 못했지만 아들에게는 기대가 큽니다. 새로운 메뉴 개발도 해줄 거라 믿고요."
유명호텔의 셰프였던 아들이 가업을 잇기 위해 시골 국밥 집으로 돌아온다는 설정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요리사 아들이 젊은 열정으로 새 메뉴를 개발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국밥을 더 소중히 여겨주길 바란다.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모든 걸 걸고 지켜온 음식이니까. 그 음식은 '안일옥' 뿐만 아니라 한식의 역사에도 소중한 음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