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신간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 로제 폴 드루아 지음

우리는 왜 희망하기를 멈추었는가? 희망에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신간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는 희망의 양면적 속성을 성찰하고, 다시 희망하는 법을 궁구한다. 신화에 따르면, 판도라의 상자에 홀로 남은 희망은 세상에 퍼진 온갖 악을 처단할 선의 보루이자 불확실성과 불행이 파견한 악의 척후병이다. 곧 희망은 최선의 미래와 최악의 미래를 동시에 꿈꾼다. 그래서 희망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당장 해결하려는 조급함에 찌든 오늘날, 우리는 희망하기를 멈추도록 강요받는다. 희망은 선망이 아닌 무관심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격하되었고, 공동체의 광장을 빠져나온 개개인이 남몰래 간직하는 자폐적인 욕망으로 전락했다. 희망에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희망의 이중성이 인간의 조건인 한 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희망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복잡다기하다. 호메로스 시대의 초기 고대 그리스인에게 희망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에 입각한 추측과 평가를 뜻했다고 한다. 희망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인 엘피스Elpis는 앞날을 예상하는 지적 능력이었던 셈이다. 소포클레스 시대 들어서 희망은 예측의 기능보다는 비이성적 위안의 기능을 담당했고, 고대 그리스 말기에는 현재를 등한시한 채 내세를 탐하는 위험한 환상이라는 개념으로 변모했다. 일신론적 종교가 득세한 이후, 희망은 언젠가는 성취되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는 역설적인 기다림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렇듯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의 세계가 희망의 고향이기 때문에, 희망은 오늘과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

인류가 희망을 외면해온 역사는 유구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망을 ‘깨어 있는 사람의 공상’이라고 일컬으면서 환상의 힘으로 현실 감각을 훼손하는 미혹으로 정의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등 고대의 여러 사상 또한 희망이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불안을 초래한다며 멀리할 것을 권고했다.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중시한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마저 희망이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수반해 결국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을 자아낸다면서 희망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존재 조건은 ‘희망의 반대 개념’인 부조리이며, 따라서 희망이 없어야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강변한 것은 카뮈였다.

희망에 대한 불신이 이토록 깊은 이유를 저자는 죽음과 허무에의 집착으로 정리한다. 치열한 삶을 옹호할 때조차 죽음과 허무를 사유의 바탕으로 삼았기에 희망은 거부당해야 했다는 것이다. 진보를 약속하지 않는 역사가 주는 환멸은 삶과 희망보다는 죽음과 허무를 토대로 인간의 조건을 검토하도록 인류를 이끌었다. 하지만 저자는 희망에 무관심한 절망 속에서는 어떠한 변화와 혁신도 상상할 수 없음을 직시한다. '희망의 원리'를 쓴 에른스트 블로흐가 소환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블로흐를 인용해 저자는 활기찬 내일을 맞이하기 위한 희망의 기술을 끊임없이 학습하고 훈련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다시 희망하기 위해서는 ‘현재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현재중심주의는 미래의 자리에 재앙과 종말과 죽음을 배치하고 현재에 순응할 것을 재촉한다. 따라서 결정론적인 물리적 인과관계와는 반대로 미래에서 현재로 흐르는 희망이 통행할 길이 막혀버렸으며, 고인 물처럼 멈춰버린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공동체적 감수성이 결핍된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즉, 시간과의 관계가 정지된 탓에 개개인을 하나의 공동체로서 역사적 시간에 배치하고 미래에 투영하는 일이 어려워진 것이다.

불확실성은 희망의 핵심적인 속성임과 동시에 희망을 난관에 봉착하게 한 원인이다. 아름다움과 윤리마저 숫자로 환산되는 21세기적 정신은 우연성과 불확실성을 제거하지 않고는 존립하기가 어렵다. 욕망의 대차대조표는 빈틈없이 작성되어야 한다. 불확실성에 기반을 둔 희망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 이유다. 하지만 저자는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행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그러한 ‘행위적 감정’인 희망은 행동과 의지를 내포하고 있기에 우리로 하여금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희망의 양면성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확실성뿐만이 아니다. 희망은 선이면서 동시에 악이다. 불행을 이겨낼 힘과 좌절하지 않을 용기의 샘이라는 측면에서 희망은 선이지만, 미래에 대한 확고한 예측과 대비는 불가능한 채 기대와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악이다. 하지만 이 희망의 역설이 곧 인간의 조건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인간의 운명은 앎과 모름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 ‘미완성’의 조건이 희망과 시간과의 관계(미래에서 현재로 ‘역행’하는 희망), 희망과 행동과의 관계(‘행위적 감정’인 희망)를 형성한다.

저자는 “희망은 절망스러운 상태에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 책을 시작해 “희망을 포기하고 버리려는 태도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반드시 배척해야 할 태도다”라는 제언으로 끝마친다. 이 책의 미덕은 맹목적으로 희망의 복음을 전하며 희망의 당위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신 저자는 위기에 빠진 희망의 의미와 역사를 철학적으로 성찰한 뒤, 멈춰서버린 현재에 시간성을 돌려주고 개인의 자폐적인 욕망을 공동체의 희망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인간성을 보존하고 강구하는 길임을 보여준다. 제5부 ‘희망하는 법 배우기’는 이 책의 백미다.

책 속으로

사라져가는 공동체적 희망에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해주고, 희망을 공개 토론의 장으로 다시금 불러와 희망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다시금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저희의 목표였습니다. 이를테면 희망의 앞길을 가로막는 ‘철학적 장애물을 발견해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맨 먼저 유럽의 철학 체계에서 희망과 관련된 사유를 고고학적 방식으로 고찰했고, 고대 그리스 사상, 유대교, 기독교에 내재된 희망의 기원을 탐색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서구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혁명기로 넘어가 희망이 종교에서 분리돼 정치의 속성을 띠고 세속화된 양상을 발견했습니다. 근대 부분에서는 희망이 진보의 확신을 주는 매개체로 쓰였음을 파악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니 오늘날 희망이 위기에 빠진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현대가 이전의 시대와 달리 ‘시간’ 및 ‘행동’과 특이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_한국어판 서문, 6쪽

희망은 한없이 양면적이다. 그러므로 과거 또는 미래, 개인 및 공동체, 긍정적 의미 및 부정적 의미 등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희망은 때로는 삶의 원동력이었다가 때로는 족쇄가 되었다가 때로는 혼란을 조장하는 억압적 기제가 되기도 한다.
_제6장 희망과 심리적 시간

우리는 희망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희망을 경멸함으로써 희망을 위협하고 있다. 희망을 양면적으로 대하고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그러한 태도를 확실히 뛰어넘고 꺾어버릴 수 있다. 나아가 우리 내면에 희망을 보존할 수 있다.
_제5부 희망하는 법 배우기, 278쪽

우리는 희망을 절제하고, 중용을 지켜 사용해야 한다. 머나먼 지평선을 동경하지 말고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하며, 영웅 심리의 정복욕을 버리고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야 하며, 막연한 이상을 접고 명확한 표적을 겨냥해야 한다. 요컨대, 더 희망하려면 덜 희망해야 한다. 희망대로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거나 희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는 식의 행동을 지양하고, 초지일관 희망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도를 넘는 희망에 맞서 절도 있는 희망이 필요하다.
_제5부 희망하는 법 배우기, 288쪽

로제 폴 드루아 , 모니크 아틀랑 지음 | 김세은 옮김 | 미래의창 | 320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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