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선수들이 먼저 낭보를 울리자 여자 선수들도 금빛 화살로 화답했습니다. 김우진(청주시청)-구본찬(현대제철)-이승윤(코오롱엑스텐보이즈)이 합작한 금메달의 바통은 기보배(광주시청), 최미선(광주여대), 장혜진(LH)으로 이어졌습니다.
남자 대표팀은 4년 전 런던 대회의 아픔을 딛고 8년 만에 왕좌를 탈환했고, 여자 대표팀은 무려 8회 연속 금메달입니다. 여자 대표팀은 양궁 단체전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단 한번도 금메달을 놓치지 않는 절대 강자임을 입증했습니다.
사상 첫 올림픽 전 종목 석권도 꿈이 아니게 됐습니다. 남자 대표팀은 이미 예선에서 김우진이 세계 신기록(72발, 700점)을 세우며 당당히 예선 1위로 올라섰습니다. 구본찬이 6위, 이승윤이 12위지만 4강에서야 만나는 대진입니다. 여자 선수들은 예선에서 1~3위를 싹쓸이했습니다. 개인전 금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오르는 이유입니다.
이러다 보니 어쩌면 한국 양궁의 금메달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사이엔가 '양궁=올림픽 金'이라는 공식이 굳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워낙 다른 나라와 격차가 큰 한국 양궁은 1988년 이후 매 대회 금메달 2개 이상씩을 수확해낸 효자 종목인 까닭입니다.
그들이 따낸 금메달의 가치가 퇴색이 된 건지 나라를 빛낸 선수에게 국민이 욕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물론 일부 몰지각한 소수지만 이런 의견이 나오는 것은 한국 양궁이 너무나 잘해와서 으레 금메달을 따겠거니 하는 마음이 은연 중에 자리잡았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신궁(神弓)들은 세계에서는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잘 해서 둔감해진 그 신기의 활솜씨는 이곳 리우에서는 경이와 찬탄의 대상입니다.
현지 팬들과 다른 나라 선수들은 너도나도 한국 선수들과 사진을 찍느라 바쁩니다. 특히 예선 세계 신기록과 단체전 금메달을 거둔 김우진은 한 이탈리아 선수와 기념 사진을 찍은 뒤 "워낙 많이 찍어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웃기도 했습니다.
7일 먼저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던 남자 선수들의 기자회견. 한 외신 기자는 김우진에게 "원숭이 띠인데 올해가 원숭이의 해라 그런 운이 따른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12지신 띠에 대한 정보까지 입수한 끝에 나온 질문. 사실 농기가 다분히 섞였지만 어쨌든 한국 양궁에 대한 불가사의에서 나온 물음이었습니다.
8일 여자 선수들에게도 비슷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와 강한 바람의 부담감에도 8연패를 이뤄낸 끄덕없는 강심장에 한 외신 가자는 "담력을 키우기 위해 뱀을 풀어놓고 훈련을 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맞느냐"는 질문까지 했습니다.
황당하긴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한국 양궁의 신기가 믿기 어렵기 때문에 나온 질문들일 겁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잘 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비결이 있길래 딱딱 10점을 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일 겁니다.
여자 단체전 결승을 지켜보던 한 러시아 기자는 최대 초속 2m까지 분 바람에도 한국 선수들이 과녁 중앙을 귀신같이 맞추자 찬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반면 러시아 선수가 6점짜리 낮은 선수를 쏘자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남자 양궁 대표팀에 대해 한 외신 기자는 "하루에 최대 700발까지 쏜다는 소문이 사실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김우진이 "400~500발은 기본이고 많으면 600발까지 쏜다"고 하자 회견장은 크게 술렁거렸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강훈련인 까닭입니다.
런던 대회 2관왕 기보배는 자신의 3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뒤 "8연패를 이뤘지만 도쿄올림픽에서 9연패에 도전할 후배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는 뼈있는(?) 농담을 했습니다. 죽을 만큼 혹독한 훈련을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양창훈 여자팀 감독은 "여자 선수들임에도 운동장을 20바퀴나 도는 체력 훈련을 했는데 최미선이 발톱이 빠진 것도 모르고 뛰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일 겁니다.
사실 양궁 대표팀은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해 극한 훈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문형철 대표팀 총감독은 "그동안 특전사, 해군특수전여단(UDT), 북파공작원 등 극기훈련을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극한 훈련은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만큼 다른 체력과 경기 훈련이 많았을 겁니다.
사실 제 자신부터 양궁 종목의 금메달은 당연시하고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방송 리포트나 노컷뉴스 기사 계획에 마치 확정이 된 것마냥 양궁 금메달을 넣어놓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남녀 단체전 금메달 기자회견에서 나온 외신 기자들의 '황당' 질문은 오히려 한국 양궁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으레, 틀림없이, 당연히 금메달을 딸 것이라는 생각만 했지 그들이 어떤 과정을 밟고, 훈련을 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보배는 경기 후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 인터뷰 도중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쏟아졌다가 잦아들었던 눈물이 지난 훈련 기간을 돌아보면서 다시 솟구쳤던 겁니다.
기보배는 "올림픽 준비하는 기간 다같이 고생한 것, 특히 선생님들(감독, 코치)이 고생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눈물이 났다"고 했습니다. 두 번이나 양궁 여제의 눈시울을 적신 것은 힘든 과정을 이겨낸 기쁨이자 서글픔 때문이었을 겁니다.
다시금 대한민국의 위상을 지구 반대편 브라질 땅에서 떨쳐준 한국 양궁에 경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남은 개인전에서도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리우 하늘에 휘날리기를 기대해봅니다.
대표팀 분위기 메이커 장혜진은 경기에 있었던 아슬아슬한 순간을 떠올리며 선수들과 웃음을 나눴습니다. 경기 후 장혜진은 남자 선수들의 조언에 대해 "어제는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무슨 조언이냐"고 농담을 하면서도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이 힘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또 두 팀 감독들은 은근한 경쟁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박채순 남자팀 감독은 "사실 여자 대표팀은 올림픽 2관왕이 6명이나 있었는데 남자는 없었다"면서 이번 대회 2관왕에 대한 기대감을 밝혔습니다.
여자 대표팀 양 감독은 "전날 남자 대표팀이 먼저 금메달을 따내면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끌어주고 밀어주며 서로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이들의 팀 워크야 말로 세계 최강 양궁 코리아의 비결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