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의 지도를 그리는 데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보이는가 하면, '신곡'의 작가 단테도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적 진리에 대한 추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삶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많은 영감을 준다. 주어진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도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적 회의주의, 대중의 선호에 무분별하게 편승하거나 탁월한 소수의 이성적 판단을 맹신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중함. 이것들로부터 우리는 철학과 역사의 긴장을 해소할 단초를 얻는다.
또한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인간적 한계에 대한 진지한 자각과 극단적 대립도 토론을 통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 이것들로부터 우리는 자명한 진리를 앞세워 폭력을 정당화했던 이데올로기의 오만한 역사를 극복함과 동시에 다양성이 가져오는 이점을 통해 정치적 삶의 가능성을 마련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 바로 이것이 정치철학자 또는 정치철학의 역할에 대한 성찰을 이런저런 방법론을 둘러싼 논쟁보다 우선시해야 할 이유다.
(본문에서)
곽준혁 교수는 이탈리아를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고대 그리스와 라틴어 텍스트와 같은 1차 자료를 직접 찾아 정치사상사를 설계했다. 또한 챕터마다 현실에서 절실한 질문들로 시작하여 정치철학이 이데아에 갇힌 학문이 아니라 우리 삶에 꼭 필요한 학문임을 입증하고 있다.
질문들을 통해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흔다섯 명의 사상가들도 저마다의 문제의식을 갖고 시장과 광장으로 나섰다.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들을 지키려 노력했고, 현실에서 부딪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절규했으며, 때로는 부패와 강제에 대항하면서 권력을 향해 진리로 맞섰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치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언술 또는 저술을 듣고 읽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그들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질문을 갖고 반추한다면 마치 내가 설득의 대상이 된 것처럼 그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이 말하는 바를 맹신하기보다 주어진 주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답만큼이나 해답을 찾는 과정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곽 교수는 크게 10가지의 주제를 씨줄로 놓고 45명의 사상가들을 날줄로 엮어 나간다. 고대 그리스는 소포클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고대 로마는 키케로에서 타키투스까지, 중세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단테까지, 르네상스는 마키아벨리에서 루터까지, 근대는 보댕에서 니체까지, 그리고 현대 학자로는 토마 피케티와 조르주 아감벤 등을 소개한다. 1 정치와 도덕은 화해 가능한가? 2 지배가 없는 권력은 가능한가? 3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나? 4 사적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5 좋은 시민이 좋은 사람일까? 6 감성적 판단은 바람직한가? 7 ‘정치적 삶’의 회복은 가능한가? 8 법은 지배하는가? 9 가능성의 평등은 요원한가? 10 설득의 정치는 가능할까?
정치철학의 생명력은 삶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세상을 바꾸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비록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이 폭력과 사회공학으로 전락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정치철학의 존재 이유는 ‘교조적 이념의 재생산’을 피해 ‘가능한 최선의 실현’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철학의 올바른 역할은 명백히 비이상적인 현실에서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방도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정치철학자의 비판적 사고는 자유와 평등을 비롯한 정치적 가치를 설득하려는 노력과 어떤 형태의 자의적 정치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리를 이야기하려는 태도에서 빛을 발한다.
(본문에서)
예를 들어, '안티고네'에서 페리클레스가 죽은 이후의 아테네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예견하는 소포클레스의 고민을 통해 도덕적인 가치판단에도 정치적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치 안정은 일반적 원칙과 특수한 경우의 균형에어 비롯된다는 것이다.
‘고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도덕적 수단이 필요할 때, 올바른 정치가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만과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사람에게 도덕적 고결함을 요구할 수 있을지’와 관련된 질문은 소크라테스 이래 서양 정치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가장 난해한 숙제다. 비록 도덕적인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현실’을 무시하면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지만, 한 명의 군주가 통치하던 시대에도 정치적 능력만큼이나 도덕적 자질이 정치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던 만큼, 정치와 도덕의 상관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본문에서)
우리가 현대 학자들의 문제제기뿐 아니라 아득한 고대인들의 정치감각까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논의가 한창인 이슈들, 예를 들어 브렉시트 사태가 야기한 직접민주주의 한계와 정치인들의 프로파간다의 문제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인 페리클레스와 로마공화주의자들의 ‘설득’의 개념에서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갈등’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으며, 핵심은 그 갈등의 해결 방법을 어떻게 모색하느냐이다. 이 책은 우리가 건강한 사고력을 갖추기 위해 ‘비판적 사고’와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우는 데 가장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공화주의자가 공화가 아니라 자유에 주목하고, 민족주의자가 영광이 아니라 공존을 열망하고, 급진주의자가 혁명이 아니라 절차에서 해답을 찾고, 자유주의자가 경쟁이 아니라 재분배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또한 갈등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대립되고 상충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대결이 폭력적 대치로 귀결되지는 방법을 고민하는 관찰자의 신중함을 제공해 주길 원한다. 만약 이 모두가 우리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진지하게 경험될 수 있다면, 새로운 제도를 가능하게 만들 정치적 상상력이 편견과 현실이라는 장벽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본문에서)
곽준혁 지음/ 민음사/ 각권 504쪽, 488쪽/ 각권 2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