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일록은 내 이름'-21세기판 '베니스의 상인'

하워드 제이콥슨이 다시 쓴 '베니스의 상인'―'샤일록은 내 이름'은 시간의 동선을 앞뒤로 자유롭게 왕복하면서 현대 세계에서 아버지, 유대인, 자비로운 인간이란 무슨 의미인지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제이컵슨은 '베니스의 상인'을 21세기 잉글랜드 첼시의 호화로운 '골든트라이앵글'로 이전시켰다. 하지만 소설은 간단한 개작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는 원작에서 고리대금업자이자 악인의 대명사로 표현되며 오히려 이 때문에 역으로 반유대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 된 최고의 적대자 샤일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샤일록은 악인인가 희생자인가'는 셰익스피어 수업에서 단골로 출제되는 시험문제이자 셰익스피어 전공자에게는 영원한 화두이며, 제이컵슨은 "샤일록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은 현대의 관심사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부유한 예술품 수집가이며 박애주의자인 유대인 사이먼 스트룰로비치. 아내가 뇌중풍으로 쓰러지고 딸은 탈선하여 사랑의 도피를 떠난 상황에서 그는 상담할 사람이 간절히 필요하다. 그래서 체셔의 골든트라이앵글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냉소적이고 자비를 모르는 유대인 샤일록과 마주쳤을 때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우정의 시작이다. 골든트라이앵글의 또 다른 곳에서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하는 플루러벨은 그녀 자신이 기획한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의 간판스타로, 성형수술과 화려한 파티를 즐기며 살아간다. 그녀는 충성스러운 남자 친구인 당통과 각종 편견들, 가시 돋친 유머 감각을 공유한다. 당통은 큐피드 역할을 하면서 스트룰로비치의 딸을 모종의 사건에 연루시키는데, 이 일은 결국 살 한 파운드의 징벌을 가져온다.

'샤일록은 내 이름'은 뇌중풍에 쓰러져 자리보전 중인 아내 케이, 열여섯 살 난 딸 비어트리스와 함께 첼시에 살고 있는 스트룰로비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스트룰로비치는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과 달리 고리대금업자도 아니고 계율을 지키는 신실한 유대인도 아니지만, '미신, 광신, 부족주의,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진지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사랑하는 딸이 유대인 남자를 남편으로 맞기를 바란다. 그러나 비어트리스는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그녀의 사춘기는 유대인이 아닌 남자와의 연애를 방해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로 점철되어 있는데, 이는 결국 그녀로 하여금 텔레비전 쇼 진행자 플루러벨과 친분을 맺게 만든다.

'샤일록은 내 이름'은 탈선 중인 딸 비어트리스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스트룰로비치가 첼시의 공동묘지에서 샤일록과 마주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 샤일록은 '베니스의 상인'의 그 샤일록이자, 원작의 무대 뒤에 있는 샤일록이다. 딸에서 촉발된 스트룰로비치의 고민에는 본질적으로는 유대인이 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반추할 시간이 충분했던 샤일록,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아닌 남자에게 딸 제시카를 빼앗긴 그는 자연스레 스트룰로비치의 대화 혹은 상담 상대가 된다. 이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란 카테고리로만 존재할 뿐이며 타자이다. "내가 다녔던 비유대인 학교에서 '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했을 때, '유대인은 눈이 없습니까' 같은 대사들로 인해 스무 명 남짓한 우리 유대인 학생 모두는 다른 학생들을 의식하게 되었다"라고 제이컵슨이 말했듯이.

소설은 스트룰로비치와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으나, 모든 사건과 장치는 샤일록을 더욱 깊이 조명하는 데 기여한다. 결국 '샤일록은 내 이름'은 그의 내적인 삶에 대한 연구이다. 스트룰로비치와 벌이는 설전은 복수, 의무, 아버지라는 것, 역사의 본질을 매섭게 뒤흔들며, 그를 유하게 만들고 희생자나 악인을 넘어 그에게 인간애를 부여하는 것은 죽은 아내 리아와 나누는 현재 진행형 대화다.

샤일록은 사랑하는 딸을 안토니오 그룹의 일원인 로렌초에게 빼앗겼고 그 그룹이 평소 그의 가족애와 종교적 본능을 경멸했기 때문에 안토니오에게 불타는 복수심을 느낀다. 이 복수심의 표시가 그가 느낀 만큼의 심적 고통을 안토니오의 가슴(심장)에서 살 한 파운드를 떼어 내어 보복하려는 심리로 표출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정의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이고 정의는 원래 보복의 그림자를 그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의만을 앞세우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은 끝날 길이 없으므로, 자비라는 인간 공동체 특유의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제이컵슨은 이 정의와 자비의 문제를 '샤일록은 내 이름'의 핵심 주제로 삼으면서, 그 문제를 살 한 점을 떼어 내는 문제와 교묘하게 대비시킨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살은 심장에서 한 파운드 떼어 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이것을 할례 의식 그리고 유대인의 피해의식을 상징하는 수음의 이미지와 결부하여 성기에서 살을 떼어 내는 것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정의와 자비를 연결 짓는다. 할례는 기독교권에서는 비인간적인 야만 행위로 여겨지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것이 야만의 정반대이고 또한 야만에서 벗어나 문명으로 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할례는 인간 목숨의 첫째 날부터 즉 어머니의 아늑한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인생을 편안한(혹은 욕망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삶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성기는 언제나 욕망에만 반응하는 기관이므로 그것에만 의지하여 살아가면 인간은 파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욕망은 원숭이로 상징된다. 반면에 심장은 생명체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생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 작동하는 기관이다. 사랑은 '샤일록은 내 이름'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적 가치로 제시된다. 여기서 제이컵슨은 이 세상의 피해 혹은 피해의식을 치유하는 힘은 욕망('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만 반응하는 정의로는 결코 완수될 수 없고, 그런 욕망과는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사랑도 함께 실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 책 속으로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누가 누구를 더 증오했나? 그건 닭과 달걀의 문제. ‘오래된’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서로가 상대방에게서 보는 악행. 이쪽에서는 오만한 배타주의, 저쪽에서는 사랑과 자비의 오만한 허세. 이것은 자본주의와 고금리의 등장 이전의 일이다. 그러면 증오 이전의 것이 아닌, 사람들의 운동이나 사상은 어떤 것이 있느냐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어쩌면 바울로 성인의 분열적인 말들을 들어야 할 것이다. 바울로 이전에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바울로 이전에는 유대인이 증오하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을 증오하는 기독교인은 없었다.

그런데 악행이 이교도가 유대인에게서 보는 모든 것이라면, 샤일록은 이교도들에게 그들의 악행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은 그에게 그 보답으로 악당 같은 자비를 독성 비처럼 마구 쏟아부었다.

이것은 그가 악행을 반어적으로 지칭한다는 뜻인가?
또 그들도 악행을 반어적으로 지칭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자비를 반어적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는 한 가지 사항은 확실하게 알았다. 그들이 그의 딸을 훔쳐 간 것은 결코 반어적 지칭이 아니었다.

_189~190쪽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시간의 우스꽝스러운 동선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기독교인의 개종에서부터 유대인의 개종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전자가 발생하지 않고 후자가 갑작스럽게 발생했다면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을까? 그래턴이 있는 혹은 없는 비어트리스. 하지만 무슨 차이인가? 그의 부모를 기념하여 그가 세우려 했으나 실패한 갤러리. 그러니 어쨌단 말인가? 뇌중풍에 맞아 쓰러진 그의 아내―그녀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종류의 세상이든 그게 그녀에게 중요할까? 샤일록의 경우 행동은 임의적으로 멈추었으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은 그를 방부 처리했다. 행동이 끝났을 때 시간마저도 끝나 버렸다면 그는 더 좋아졌을까? 그는 더 많은 혹은 더 적은 영향을 미쳤을까? 모든 환상 중 가장 거대한 환상은 시간이 산통을 겪으면서 자애로운 변화를 출산하리라는 것이다.

_407~408쪽

하워드 제이컵슨 지음/이종인 옮김/현대문학/436쪽/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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