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폭위에 변호사 참석시키겠다"…곳곳에서 '홍역'
이 학교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A고등학교 측은 ‘학폭위에 변호사도 참석이 가능한 지’를 서울시교육청에 문의해 ‘변호사 참석 자체를 막을 근거는 없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처럼 최근 초·중·고교에서 학교폭력 사건을 심의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서면 사과’부터 ‘학내봉사’, ‘사회봉사’, ‘출석정지’, ‘전학’, ‘퇴학’ 등의 조치를 내리는 학폭위에 변호사가 개입하는 일이 크게 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학교 폭력 전담 전수민 변호사는 “변호사의 학폭위 참석과 관련해 일선 학교로부터 한 달 평균 2건 정도 문의를 받고 있다”면서 “실제로는 더 많은 학교들이 이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오후 인천 연수경찰서에서 열린 ‘학교폭력 연구모임’에서도 변호사의 학폭위 참석 문제가 주요하게 다뤄졌다. 이날 모임에는 초중고 학교폭력 담당 교사들과 학교전담경찰관, 교육청 관계자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한 참석교사는 “학폭위에 참석한 변호사가 ‘더 이상 답변할 수 없다’며 사실관계 확인조차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또 다른 교사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 구도 속에서 어느 한 쪽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오면 서로 감정싸움만 격해져 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 서울 강남에 '학폭위 전문' 법률사무소도 등장
서울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학폭위 사건’을 취급하는 법률사무소 10여 곳도 성업 중이다.
이들은 온라인 광고와 홈페이지, 불로그 등을 통해 “피해사실을 학폭위 위원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학부모에게 확실한 방안을 자문하고 의견서 등을 작성해 준다”고 홍보하고 있다. 또 필요할 경우, 변호사가 직접 학폭위에 참석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B법률사무소의 경우, 학폭위 사건이 전체 수임 사건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 법률사무소 관계자는 “학폭위 대응과 관련해 하루 평균 4~5건의 상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1주일에 약 3건의 학폭위 사건을 수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학폭위에 교사와 학부모 등 비전문가 출신이 많은데다 징계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없어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려는 학부모들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일선 초·중·고교가 점차 ‘법적 쟁송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지만, 교육부는 변호사의 학폭위 참석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교육부 학교생활문화과 정민재 사무관은 “법률적으로 변호사의 참석을 막을 수 있는 규정은 없다”면서 “학폭위가 자율적으로 변호사의 참석 여부를 결정하도록 지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일선 학교 학폭위도 저마다 다른 방침을 내놓고 있다. 변호사의 학폭위 참석을 허용하는 학교가 있는 반면 불허하는 학교도 있다. 또 가해학생 측과 피해학생 측 모두 신청할 경우에만 변호사 참석을 허용하는 학교도 있어 학부모와 교사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 "학교는 사법적 판단을 하는 법원과는 분명 달라야"
학교 폭력 사건의 초기단계부터 변호사가 개입하는 세태에 대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도 크다.
학폭위는 피해학생을 보호하고 가해학생을 선도하는 교육적 조처를 목적으로 하는 만큼 변호사까지 개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좋은교사운동본부 박숙영 교사는 “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많은 학교 폭력 사건들이 변호사까지 개입하는 과잉대응으로 오히려 정신적·물질적 피해와 행정력 낭비로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천교육청 김일붕 학교폭력상담사는 “학폭위에 참석한 일부 변호사들은 설문조사나 증인 신청 등을 요구하며 운영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면서 “교육적 조치를 하는 학교는 사법적 판단을 하는 법원과는 분명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총 정책기획국 김희환 변호사는 “교육적 문제를 변호사를 동원해 법률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평가하면서도 “학폭위원들의 전문성을 높여 학부모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도 동시에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