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소설은 작가가 알고자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정지돈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

소설가 정지돈의 첫 작품집 '내가 싸우듯이'가 출간되었다. 정지돈 소설에서는 ‘이것도 글일까, 이것도 문학일까’라는 질문들이 반복된다. 걷거나, 앉아서 쉬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조차 제약 없이 읽고 쓰는 그의 소설(「미래의 책」) 속 주인공처럼 작가는 자신이 읽어낸 것을 체화한 뒤 다시 새로운 글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이어 나간다. 그의 글 뒤에 따라 붙은 줄줄 흐르는 듯한 “참고문헌”이 “작품으로 이행”하는 장면은 곧 한 편의 소설이 된다. 작가 스스로 “20세기와 20세기의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듯 작가 정지돈은 한 세기 전의 작가와 작품을 탐독하며 지금 세상을 다시보기 한다. 그의 소설 속에는 실존 인물들이 가상의 사건과 뒤엉켜 새로운 서사를 만들며 독자를 혼돈의 세계로 몰아간다. 실제 인물이 겪은 실제 사건인가 싶으면 상상의 세계이고, 허구인가 싶으면 불쑥불쑥 사실로 나타난다. 이렇게 사실과 상상이 경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작가의 실제 모습 또한 자유롭게 소설 안팎을 드나든다.

정지돈의 소설은 특유의 산문성을 갖는다. 허풍처럼 내세운 허무주의 속에서도, “이상이 없는 자가 어떻게 혁명가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 속에서도 자신만의 ‘메시지’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소설은 작가가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알고자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하는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며, 그러한 글쓰기의 도정 자체를 즐긴다. 작품 속에서 글쓰기를 권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에리크는 자신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
-「눈먼 부엉이」

사이먼의 말에 톰은 뭔가 찌릿한 것을 느꼈다. 사이먼은 소설을 쓰는 것(또는 아무런 글이나)만이 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왜? 톰이 물었다. 써보면 알게 돼. 사이먼이 말했다.
-「여행자들의 지침서」

책 속으로

레이날도는 뉴욕에 자리를 마련했다. 뉴욕은 환상적이었다. 높은 빌딩과 고풍스럽고 세련된 극장, 아름다운 남자와 우아한 여자들. 겨울이 되면 눈이 왔고, 가을에는 낙엽이 졌으며, 여름에는 해변으로 갔고, 봄에는 바람이 불었다. 눈. 레이날도는 특히 눈이 좋다고 했다. 쿠바 사람들에게 눈은 여신 같은 존재야. 음악이고 꿈이고 섹스지. 레이날도가 말했다. 나는 레이날도에게 뉴욕에서는 행복했던 거냐고 물었다. 망명자는 도망치는 존재야. 행복을 느낄 여유가 없어. 레이날도가 말했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거냐고 물었다. 레이날도는 의자 깊숙이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로부터 도망치는 거야, 친구. 나로부터.
-「뉴욕에서 온 사나이」, p. 58

그는 늪을 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의 옆에 조심스레 앉았지요. 그리고 미국에 가도 되는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선생은 미국에 가려면 펜실베이니아로 가라고 하더군요.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펜실베이니아로 가라고 여러 번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내친김에 설계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평소와는 달리 겁 없이 물었고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겨 물끄러미 늪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욕실을 그리세요. 그는 자신의 경험,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3년 동안 욕실 도면만 그렸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일종의 건축적 면벽 수련입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 p. 174

정지돈 지음/문학과지성사/320쪽/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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