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총장은 1년여 만에 한국을 찾은 25일 세간의 예상을 깨고 공개리에 대권 도전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년 1월 1일 한국 사람이 되니까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를 그때 가서 고민하고 결심하겠다".
그럼 지금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말인가? 반기문 총장의 국적은 대한민국으로 그는 엄연한 한국 사람이다. '세계 대통령'으로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으로서의 역할에 마지막까지 충실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대통령' 얘기는 그의 말대로 유엔사무총장직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 했어야 옳다. 그리고 이번 방문에서는 1년 전에 자신이 했던 발언 수위를 유지하는 게 나았다.
반 총장은 지난해 5월 한국을 방문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대권 출마설에 대해 자신의 정치적 행보나 여론조사 등을 자제해 달라면서 다음부터는 여론조사기관에서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1년만에 그의 말과 행동은 180도 바뀌었다. 국내 정치 상황과 구도가 변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겸손 속에 권력 의지를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아무런 해명이 없다.
유엔사무총장 퇴임을 7개월 앞둔 시점에서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반 총장을 "가장 우둔하며 최악의 사무총장 가운데 하나(the dullest - and among the worst)"라고 비난한 것은 지극히 편향적인 보도라고 본다.
그러나 법적 구속력은 없다 하더라도 '유엔 사무총장은 퇴임 직후 정부내 직책을 삼가야 한다'는 1946년 유엔 총회 결의안의 정신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버터 발음'이 아닌 '한국식 토종 발음'의 반기문 영어는 외국 현지인들에게 진정성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구사하는 한국어에는 '기름 바른 장어'처럼 솔직함이 결여돼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평생 외교관으로서 다져진 수사(修辭)일 수 있지만 대통령을 하겠다면 그의 한국어에는 그의 영어 억양처럼 '어눌한 진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반 총장은 25일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국가통합을 위한 정치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해 놓고 정작 하루가 지난 뒤에는 "(언론이) 과잉, 확대해석 했다"고 슬쩍 한 발을 뺐다.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향을 국내에 최초 보고했다는 외교문서 내용에 대한 언론보도에는 "기가 막힌다. 제 인격에 비춰 말도 안된다"고 적극 부인했다.
지난해 말 체결된 한일 양국간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해서는 환영 입장을 발표해 논란을 야기해 놓고 석달 뒤 유엔본부를 찾은 몇몇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는 "오해가 있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 정부의 노력에 대해 환영한 것이지 합의내용을 환영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과의 1월 1일 전화통화에서 "박 대통령이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했던 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엔사무총장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오해를 살 행동은 피해야겠지만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국가 우선주의'를 지향하는 보수주의를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그는 한국 국민들이 갖는 정서를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유엔사무총장으로서 질병과 기아로 허덕이는 어려운 나라를 수차례 위로 방문했지만 한국을 찾아 제주, 서울, 경기, 경북을 도는 이번 5박 6일의 '광폭행보'에는 고통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정은 없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나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는 모습은 생각만해도 멋지다.
'국민 통합'의 실현을 위해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은 '공감 리더십'이다. '공감 리더십'은 비를 맞는 사람들에게 우산을 건네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내년은 '나를 믿고 따르라(trust me, follow me)'는 식으로 말할 때가 아닌 '내게 보여주시오(show me)'의 시기이다. 여기서 나는 국민을 지칭한다. 반기문 총장은 내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 왜 자신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