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이젠 여기서 편히 쉬세요. 자주 찾아뵐게요…"
12일 오후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
아버지 봉안함 앞에서 정명교씨는 나지막이 말을 꺼내고는 한참을 서 있었다.
그의 손은 사고 당시 아버지가 썼던 안경을 쥐고 있었다. 아버지 유품을 추모관에 보관하고 싶어 집 장롱에서 꺼내 왔다.
바다에서 건진 소금기를 머금은 안경테는 푸르스름하게 색이 바랬다.
'그날'로부터 벌써 2년이 지났음을 색 바랜 안경테는 말하고 있었다.
정씨의 부친은 초등 동창들과 함께 '환갑 여행'을 떠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2년간 뿔뿔이 흩어졌던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들의 봉안함이 인천가족공원(옛 부평공동묘지)내 추모관 개관을 앞두고 한자리에 모였다.
추모관에는 단원고 학생·교사를 제외한 일반인 희생자 45명 중 41명의 봉안함이 안치된다.
일반인 희생자 중에서는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실종자 3명, 안산 단원고 학생과 함께 안치된 1명이 빠졌다.
왜 구명조끼를 입지 않느냐는 학생 물음에 "너희 다 구하고 나도 따라갈게"라며 구조활동을 멈추지 않은 승무원 박지영씨, 아내에게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통장에 있는 돈으로 아이들 학비 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양대홍 사무장의 봉안함도 추모관으로 옮겨졌다.
사고로 가족 모두를 잃은 최연소 생존자 권모(당시 5세)양의 어머니도 이곳에 안치됐다. 권 양은 제주도로 이사를 하려고 아빠·엄마·오빠와 세월호에 탔다가 혼자 구조됐다. 권양의 아버지·오빠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환갑을 기념해 단체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동행하게 된 인천 용유초등학교 동창생 12명의 봉안함도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별처럼 빛나던 아들과 딸을 떠나보낸 단원고 유족 못지않게 일반인 희생자 유족의 슬픔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남몰래 눈물을 삼켰던 날도 많았다.
참사 초기 정부의 수습대책이나 국민 관심이 상대적으로 단원고 희생자에 집중됐지만 차마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승무원 희생자 유족은 청해진해운 소속 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감수해야 했다.
2014년 9월에는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을 수용했다가 단원고 학생 유족 측과의 갈등이 부각되기도 했다.
일반인 희생자 대책위는 당시 "최종 타결안을 또 거부하면 국민도 유족에게 등을 돌리고 진상 규명을 위한 명분도 잃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며 합의안을 수용했지만, 일각에서는 안산 유족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일반인 희생자 대책위원회에서 대변인을 맡고 있는 정명교씨는 "일반인 희생자 대부분은 가족 생계를 책임지던 분이어서 유족이 더 힘든 상황이었다"며 "가족을 잃은 슬픔과 함께 억울함과 소외감까지 겹쳐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지만 이젠 모든 것을 가슴에 묻으려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은 전체 희생자 304명(사망자 295명, 실종자 9명) 가운데 일반인 희생자 45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국비 30억원을 들여 인천가족공원 안에 지상 2층, 전체넓이 487㎡ 규모로 세워졌다.
하늘에서 봤을 때 리본 모양을 형상화한 추모관은 세월호 축소 모형, 희생자 유품, 추모비, 세월호 관련 기록물 등을 갖췄다.
추모관 개관식은 16일 오후 3시 추모관에서 유족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