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시오와 참호전의 아버지 곤살로 데 코르도바
게릴라 전술로 몽골군을 물리친 쩐흥다오
오늘날 대포의 원형을 만든 알프레트 크루프
독일군의 암호를 깨뜨린 앨런 튜링
<전쟁사를 움직인 100인>에서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을 망라한 100명의 인물을 통해 전쟁의 역사를 추적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칭기즈 칸, 나폴레옹 같은 정복군주, 프리드리히 대왕, 표트르 대제 같은 개혁가, 한니발, 스키피오, 을지문덕, 척계광 등의 명장과 손무, 조미니, 클라우제비츠 등의 군사이론가를 비롯해서 대포를 만든 크루프, 기관총을 발명한 맥심, 잠수함의 아버지 홀랜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베스트셀러 자동소총을 개발한 칼라시니코프 등. 이들은 다양한 신분과 배경을 지니고, 역사에 흔적을 남긴 이유도 각기 다르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의 활약이 성공과 실패 여부에 상관없이 전쟁사의 중대한 혁신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각 인물의 생애를 소개하고, 그들이 참여한 전쟁을 통해 당시 세계의 변화를 살펴본다. 또한 중간에 당시 시대상에 관련된 내용을 담은 Tip을 배치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20세기 들어 대량살상무기가 등장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고, 미디어의 발달로 전쟁의 참혹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생생히 전달되었다. 그러면서 오늘날 사람들에게 전쟁은 파괴와 살육을 가져오는 악의 화신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그 파괴의 잿더미 위에서 인간이 이룩해 놓은 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역사상 최초로 강화조약을 체결한 이집트의 람세스 2세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영웅 아흐마드 샤 마수드까지, 전쟁의 승패를 가르고 역사를 바꾼 사람들을 만나 보자.
책 속으로
지긋지긋한 유구르타 전쟁을 끝내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집정관이 된 마리우스는 당장 군제 개혁에 착수했다. 가난한 빈민들을 모집하고 급료를 지급함으로써 본격적인 직업군인을 양성한 것이다. 아울러 지휘권을 장군에게 일원화하고, 병사들의 창과 방패를 개량해서 좀 더 효율적으로 전투에 나설 수 있게 만들었다. 이렇게 바뀐 병사들은 ‘마리우스의 노새’라고 불렸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위기에 빠진 로마군을 다시 강력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가난한 빈민들을 군대가 흡수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키는 효과도 가져왔다. 하지만 군대에 대한 원로원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병사들이 자신에게 급료를 주는 장군에게 충성을 하게 되어 제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 012 시민군에서 상비군으로 로마군을 개혁한 가이우스 마리우스 (83~84쪽)
이때 코르도바는 ‘테르시오Tercio’라 불리는 새로운 대형을 선보였다. 장창인 파이크를 든 병사들이 방진을 이루고 막는 사이, 화승총인 아쿼버스와 머스킷을 든 총병들이 사격을 해서 적을 쓰러뜨리는 방식이다. 비록 대포와 화승총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중세 시대의 전투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다른 유럽 국가의 전술에 비해서 상당히 선진적인 전술이었다. 코르도바의 테르시오는 1503년, 바를레타 인근 체리뇰라Cerignol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빛을 발한다. 기습적으로 체리뇰라 마을을 점령한 코르도바는 참호를 파고 뾰족한 말뚝을 박아서 적의 기병을 막는 한편, 유인전술을 폈다.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일단 방어를 했다가 반격에 나서는 작전을 짠 것이다. 코르도바의 유인전술에 걸려 기세 좋게 진격한 프랑스군 기병들은 참호와 말뚝에 막혀서 허둥거리다 화승총의 사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 와중에 프랑스군 지휘관이 전사하면서 지휘계통이 마비되고 말았다. 뒤따라 공세에 나선 프랑스 보병과 용병들 역시 참호를 돌파하지 못했고, 그 사이 코르도바는 자신의 병력으로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코르도바가 창안한 테르시오 전술에 막혀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붕괴했다. 프랑스군이 3,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반면, 스페인군은 불과 100∼200명밖에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체리뇰라 전투는 전쟁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무장한 기사와 병사의 숫자로 결판이 나던 전쟁이 이제는 화약과 참호로 승부를 보게 된 것이다.
- 041 테르시오와 참호전의 아버지 곤살로 데 코르도바 (272~274쪽)
크루프 사가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1830∼1840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알프레트 크루프는 1815년에 종식된 나폴레옹 전쟁 같은 것이 다시 일어나리라 판단하고 강철대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강철이 대량생산되기 전까지 대포를 만드는 데 사용되던 청동을 비롯한 금속의 질은 좋지 못했다. 그래서 위력을 높이려면 포신砲身을 아주 두껍게 만들어야 했다. 포탄 발사용 화약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포신이 폭발할 수 있어서였다. 그러면 대포는 이동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워져서 성벽에 거치해 방어용으로 사용되었다. 반대로 대포를 공성용으로 사용할 때에는 성 주변에 진지를 만들고 배치해야 했다. 가벼운 대포를 많이 만들어 군대를 충실하게 무장시키고 기동력도 높이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럴 경우 들판에서 적 보병대를 공격하는 데 유리할 뿐, 적의 요새를 파괴하거나 도시 주민들에게 겁을 주기 어려웠다. 크루프 사의 강철대포는 작고 가벼우면서 막대한 폭발 압력에도 끄떡없었다. 즉, 작더라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알프레트 크루프는 포탄을 재장전할 때 포구砲口에 화약과 포탄을 순서대로 밀어 넣고 꽂을대로 눌러주느라 발사속도가 떨어진다는 포병들의 불평에도 주목했다. 특히 해군 전함에서는 재장전 때마다 대포를 포문 안으로 다시 끌어넣어야 했다. 크루프는 포탄을 대포의 후미에서 장전하는 후장포後裝砲를 개발했다. 오늘날 대포의 원형을 만든 것이다.
- 067 오늘날 대포의 원형을 만든 알프레트 크루프 (437~438쪽)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령으로 진급한 두에는 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병사들이 무참하게 죽어 나가던 참호전의 타개책을 찾았다. 그 일환으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항공기를 이용하여 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전략을 고안했다. 적국의 수도를 비롯한 주요 도시를 폭격하여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과 철도 등 인프라를 파괴하고, 주민들 사이에 전쟁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감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두에는 <제공권>에서 고대에 육군을 보조하던 선박부대가 독자적인 해상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해군으로 독립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항공대가 지상군과 함대를 보조하는 것을 넘어서 독자적으로 적 후방 공격작전 등을 펼칠 수 있도록, 항공대를 공군으로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군이 사용할 폭탄은 ‘폭발성, 인화성, 유독성’ 등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생화학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가 항공기용 무기로 가장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즉, 훗날 강대국 공군에서 사용할 네이팜탄이나 핵폭탄 같은 무기를 일찌감치 제시한 것이다.
- 080 현대 공군의 아버지 줄리오 두에 (533~534쪽)
정명섭, 장웅진 엮음/청아출판사/ 684쪽/ 2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