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기차에서 처음 만난, 모르는 여자에게 남자가 이렇게 말한다.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는 의도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충분히 '성희롱'으로 받아 들여질 수 있는 말이다.
영화 '그날의 분위기'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한 쪽에서는 '원나잇'이라는 소재로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풀어낸 수작이라고 하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여성 비하 소지가 있는 작품이라고 비난한다.
사실 큰 줄기는 전자가 맞다. 예고만 보면 마치 '원나잇 영웅담'일 것 같아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 '원나잇'을 즐기던 남자가 연인과의 관계가 위태로운 한 여성에게 가볍게 다가가지만 서로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연인이 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
이 남자는 '원나잇'을 권유할 뿐이고 선택은 여자의 몫이다. 오히려 막상 '원나잇'을 하려는 상황이 되자 신중한 관계를 갖고 싶은 남자가 먼저 여자를 저지 시킨다. 감정 배분 또한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쏠려 있지 않다.
문제는 캐릭터들의 표현 방식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캐릭터들을 통해 여기 저기 나타난다. 강선배(조재윤 분)와 김재현(유연석 분)은 기차 티켓을 끊어 주는 여성 직원을 앞에 두고 "너 그 여자랑 잤냐?"는 말을 주고 받는다. 여성 직원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올려다 본다.
그런데 직원은 똑같은 '음담패설'을 주고 받았음에도 김재현에게는 웃어주고, 강선배에게는 경멸의 눈길을 보낸다. 그야말로 '유연석이니까 괜찮아'의 영화판이다. 여성들이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고, 잘생긴 남자라면 무슨 짓을 해도 좋아한다는 사고가 전제 된다.
김재현과 배수정(문채원 분)의 첫 만남도 예외는 아니다.
배수정이 승무원과 부딪쳐 김재현 무릎 위에 앉는 불상사가 발생하자 여성인 승무원이 "좋은데 앉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김재현은 노골적으로 '엉덩이 감촉이 좋았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무려 주인공 두 남녀의 기념비적인 첫 스킨십이다. 다소 비현실적인 승무원 캐릭터는 수정이 재현의 무릎 위에 앉도록 유도해, 결국 이것을 제스처까지 이어지게 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첫 스킨십'이라는 중요한 장면을 굳이 이렇게 자극적인 방식으로 풀어냈어야 했는지 의문스럽다.
로맨틱 코미디 특성 상, 두 주인공의 스킨십은 재미있게 전개될 수도 있다. '그날의 분위기' 역시 그런 의도에서 이런 장면을 삽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재밌는 이 장면은 성희롱에 노출되기 쉬운 대다수 여성 관객들에게 불쾌하게 다가올 위험이 크다. 이 영화가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성을 풍자한 영화가 아니라면 말이다.
수정의 단골 대사는 '원나잇'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라는 한 마디다. 그대로 해석하면 '나는 원나잇하는 여자가 아니다'라는 의미다. 충분히 개인적 성향으로 치부 될 수 있는 말인데 어딘가 부정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조를 지키지 않고 원나잇하는 여성은 좋지 못하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조 관념 없는 가벼운' 여자로 보일까 걱정하는 수정과 달리, 재현은 그런 수정의 말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사회 분위기 상, 남성이 정조를 지키지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각 캐릭터의 설정이라고 하기에는 성적 욕구에 대한 전형적 남녀 차별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남성은 얼마든지 자신의 욕구를 자랑스럽게 표현할 수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 물론, '정조'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만은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영화 속 수정이 스스로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당당히 역정을 내는 것처럼.
절정은 차 안에서 재현과 수정이 '원나잇'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순간이다.
재현은 도저히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는 수정에게 '원나잇'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수정은 재현에게 "처음 보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자자고 하는 건 성희롱"이라고 언성을 높인다. 재현이 자신을 '꽉 막힌 여자' 취급을 하자 자신도 개방적이라면서 반박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남성들이 본인들 좋을 목적으로 '원나잇'하는 사람이 '개방적'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흐름을 따라가 보면 수정에게 '개방'이란 성적인 것과 무관하게 성향이 '개방적인'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이 앞에서 수없이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던 그가 갑자기 여성 주체적인 말을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문제는 영화에서 이런 말을 하는 수정이 어떻게 그려지느냐다. 수정은 감정에 휩싸여 화를 내기 급급하고 재현은 그런 수정에게 침착하게 반박한다. 재현의 행동을 분명히 '성희롱'이라고 말하지만 그 단어에는 힘이 없다. 수정이 진심으로 그것을 '성희롱'으로 인식하면 두 남녀의 사랑 영화가 아닌 성범죄 영화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수정은 본심을 숨기고 자신을 포장하는 '튕기는 여성'에 불과하다. 사실 수정이 끝내 재현에게 설득 당할 운명인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이율 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끝까지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적 시선을 고수한다. 잘 나가던 남자 캐릭터 인생에 제동이 걸리면 "고작 여자 때문에"라는 대사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여성은 동등한 인격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남성의 사회적 성공을 가로막는 방해물로 전락한다.
당연한 결말이겠지만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돌고 돌아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남성의 시각과 관점에서 왜곡된 여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