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오늘 뭐했지?]허재 vs 이충희, 승자는 누구?

"왕년에는 펄펄 날았는데." 1990년 허재는 기아산업개발 유니폼을 입고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자료사진=KBL)
[90년대 문화가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토토가'는 길거리에 다시 90년대 음악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90년대는 스포츠의 중흥기였습니다. 하이틴 잡지에 가수, 배우, 개그맨 등과 함께 스포츠 스타의 인기 순위가 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면 90년대 스포츠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90년대 문화가 시작된 1990년 오늘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프로농구 정규리그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모비스가 단독 선두 자리를 다시 탈환한 상태인데요. 모비스의 전신이 어떤 팀인지 아시나요? 바로 실업농구를 평정한 뒤 프로 원년 우승까지 거머쥔 기아였습니다.

1990년 오늘, 그러니까 2월25일은 바로 기아산업개발이 농구대잔치에서 우승을 차지한 날입니다.


당시 기아는 정상 전력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KCC 감독 자리에서 내려온 '농구대통령' 허재가 코뼈 골절과 허리근육통으로 입원했고, 김유택(중앙대 감독)은 사생활 문제로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유재학(모비스 감독)은 무릎 부상으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상태였고요. 반면 현대전자는 3차 대회에 결장했던 이충희가 최우수팀 결정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허재는 최우수팀 결정전 1차전을 앞두고 퇴원을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진통제 투혼을 펼치면서 1차전 77-74 승리를 이끌었죠. 허재는 3점슛 3개를 포함해 29점을 올렸습니다.

현대전자의 간판 슈터 이충희도 32점을 올렸는데요.

하지만 골밑 싸움에서 기아가 압도적이었습니다. 김유택이 빠졌지만, 207cm 최장신 한기범과 함께 현 국가대표 센터 이종현(고려대)의 아버지인 이준호와 이훈재(상무 감독)가 골밑을 지켰습니다. 특히 트라이 앵글 앤드 투라는 수비 전술이 기아의 장기였습니다. 세 명이 뒤에 서고, 강정수(칭다오 감독)와 정덕화가 이충희, 이문규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녔습니다.

막판에 이충희의 3점과 김성욱의 자유투로 현대전자가 74-72로 앞섰는데요. 하지만 기아는 현대전자의 팀 파울로 얻은 자유투를 한기범과 허재가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그 땐 던지면 다 들어갔는데." 1990년 3차 대회를 거르면서 최우수팀 결정전을 준비했던 이충희. (자료사진=KBL)
2차전이 바로 25년 전 오늘 열렸습니다. 기아가 이기면 우승, 현대전자가 이기면 3차전으로 가는 상황이었죠.

경기는 치열했습니다. 현대전자의 쌍포 이충희와 이문규는 강정수, 정덕화의 끈질긴 수비를 뚫고 21점, 20점씩을 넣었습니다. 덕분에 후반 5분을 남겨놓고 51-51로 팽팽히 맞섰습니다.

하지만 2차전 역시 높이의 차이에서 승패가 결정됐습니다. 한기범이 24점, 12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현대전자 골밑을 휘저었고, 허재도 22점에 9개의 리바운드를 보탰습니다. 현대전자는 김성욱, 최병식, 이호근(여자농구 삼성 감독) 등이 버텼지만, 신장의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기아는 51-51에서 허재가 3점 라인 1m 뒤에서 3점포를 꽂아 경기를 뒤집었고, 이어진 허재와 정덕화의 연속 3점슛과 강정수의 가로채기 후 속공으로 62-53으로 달아나 승부를 갈랐습니다. 결국 72-67, 기아의 승리. 1986년 창단한 기아는 창단 4년 만에 농구대잔치 2연패를 달성하며 신흥 강호로 떠올랐습니다.

허재와 이충희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지만, MVP는 골밑을 장악한 한기범에게 돌아갔습니다. 여자부는 우승팀 국민은행의 조문주가 MVP로 뽑혔습니다.

창단 4년 만의 2연패. 현대전자와 삼성전자가 양분하던 남자 농구계에 기아라는 신흥 강호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는데요. 역시 기아의 강점은 중앙대 출신으로 꾸려졌다는 점입니다. 한기범을 시작으로 김유택, 강정수, 그리고 허재가 차례로 입단했는데요. 이후 강동희, 김영만(동부 감독)도 기아 유니폼을 입으면서 프로 원년까지도 농구판을 호령했습니다. 이처럼 중앙대가 대부분을 차지했던 터라 연세대 출신인 유재학, 정덕화 등의 불화설이 나돌기까지 했었죠.

이렇게 기아의 우승으로 끝난 89-90 농구대잔치가 가장 아쉬웠던 선수는 바로 이문규가 아닐까 싶습니다. 현역 생활 마지막 대회였기 때문이죠. 1978년 처음 대표팀에 발탁된 이문규는 11년 동안 대표 생활을 했고, 당시에는 현대전자 주장이기도 했는데요. 가드부터 센터까지 모든 포지션을 섭렵했던 이문규는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21년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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