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스버그 연설' 150주년…美에 부는 '링컨 바람'

"링컨 아니었다면 그 많은 北軍이 진격했겠느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명연설로 평가되는 '게티스버그 연설'을 한 지 19일(현지시간)로 꼭 150년을 맞는다.

불과 272단어로 구성된 2분 남짓의 이 짧은 연설이 가져온 파장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광범위한 울림을 주고 있다. 정치사상과 철학, 문화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전환점이었다는 후세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링컨이 남긴 정치적 유산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미국 내에서 일고 있다.

미국내 최고의 '링컨 전문가'로 통하는 하버드대 드루 길핀 파우스트 총장은 17일 워싱턴포스트(WP)에서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링컨의 유산이 약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를 비판했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처럼 민주적 정치제도가 실종된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파우스트 총장은 "이제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링컨의 권고를 따르고, 케티스버그 희생자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우리 같이 헌신해야할 시점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 "링컨의 힘…北軍 예상보다 강했다"

파우스트 총장이 WP 기고문에서 새롭게 강조한 대목은 링컨이 아니었으면 그 많은 북군(北軍)이 집결할 수 있었겠느냐이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69년 북부주들의 인구는 2천200만명이었다. 이중 무려 10%에 달하는 220만명이 전쟁에 참여하고 36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게티스버그 연설'의 표현대로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전쟁에 임했다는게 파우스트 총장의 설명이다.

그는 "만약 링컨이 아니었고 전임자인 제임스 뷰캐넌이 대통령으로 있었다면 220만명을 동원할 수 있었겠느냐"며 "오늘날 미군은 고작 우리 인구의 1%에 불과하다. 3억1천만명 가운데 10%인 3천100만명이 과연 어떤 명분과 동기로 그들의 목숨을 희생하려고 하겠느냐"고 물었다.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미국 연방에서 탈퇴할 때만 해도 남북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은 낮았다. 우여곡절 끝에 전쟁이 시작됐지만 초기에는 군사적 충돌이 오래갈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로버트 리 장군을 중심으로 북부로 진격하는 남군의 기세가 워낙 거셌던데다 1864년 대선에서 링컨이 패배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상황은 다르게 돌아갔다. 링컨을 보고 북군에 자원하는 젊은이들이 의외로 많았고 그 투지 역시 대단했다는 설명이다. 파우스트 총장은 "자원하는 병사들은 자신들이 무언가 고귀하고 추상적이며 이타적인 명분을 위해 싸우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링컨이 '게티스버그 연설'을 통해 전쟁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려고 시도한 것은 이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전쟁에 기꺼이 자원해 목숨까지 바친 수만명의 넋을 위로할 '명분'을 제공해야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었다.

링컨은 연설에서 "우리는 그들의 업적을 결코 잊을 없을 것"이라면서 '헌신'(dedication)과 '결의'(resolve)'라는 표현을 수차례 썼다.

여기에는 1848년 프랑스 혁명 실패 이후 전체주의로 회귀하려는 유럽 상황에 맞서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는 링컨 자신의 '사명감'도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에드워드 에버렛도 주목하라

사실 1863년 11월19일 게티스버그에서 열린 북군희생자 추도식 행사의 주인공은 링컨이 아니었다. 당시 최고의 웅변가로 통했던 에드워드 에버렛이 추모연설을 하고 링컨은 형식적인 헌사만 부탁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후세 사가들은 2시간 넘게 장광설을 토해낸 에버렛 대신 2분 남짓의 간결한 연설을 한 링컨을 '최고의 명연설가'로 평가했다.

항간에서는 링컨이 즉흥적으로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계산에 따라 치밀한 준비 끝에 나온 '장고의 산물'이었다는게 링컨 전문가인 게리 윌스의 설명이다. 특히 링컨은 당시 '전보'를 보내기 쉽도록 간결하고 명료한 어법을 사용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에버렛의 연설이 150년전의 전쟁상황을 매우 세밀하게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게티스버그 재연행사 대부분이 에버렛의 연설내용에 따라 상황을 재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전쟁 사상 최악의 전투로 평가되는 게티스버그 전투는 전쟁의 흐름을 북군 쪽으로 바꿔놓는 전환점이었다는 평가가 대체적이지만 다른 주장도 나온다.

영화배우인 모건 프리먼이 제작한 동영상에 따르면 당시 전세는 모든 전선에서 북군으로 기울어있었고 남군은 동부 쪽에서만 '경이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게티스버그 전투는 로버트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이 북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린 전투였다는 주장이다.

◇ 역대 대통령들, 링컨과 '거리두기'

게티스버그 연설의 주인공인 링컨은 후대 대통령들에게 한편으로는 존경의 대상이면서 한편으로는 거리를 둬야할 대상이었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링컨 이상으로 명연설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그의 업적과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게티스버그 추모행사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거나 연설을 행하는 일이 '드문드문' 이뤄져왔다는 설명이다.

링컨 사후에 가장 먼저 게티스버그 추모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19대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이었다. 1878년 5월 게티스버그를 방문해 수분간에 걸쳐 짧은 연설을 했고 말미에 링컨의 화두인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언급했다.

게티스버그에서 의미있는 연설을 한 첫 대통령은 1913년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었다. 개인적으로 게티스버그 연설을 '매우 높이' 평가한 윌슨 대통령 역시 명연설 덕분에 프린스턴대 총장에서 대통령으로 등극한 인물이다. 당초 윌슨 대통령은 초청을 거절했다가 나중에 정치적으로 불이익이 있을 것을 우려해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공허하게 국민통합을 언급하는 선에 그쳐 청중들을 실망시켰다.

게티스버그 연설을 정치적 동기에 활용한 대통령도 많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8년 7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뉴딜 정책'을 홍보하기도 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게티스버그 연설에 대해 존경심을 느끼면서도 경계감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그는 100주년을 맞은 1963년 게티스버그 국립묘지를 방문했으나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해 7월 게티스버그 전투를 기념하는 메시지를 간략히 내보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자신의 유명한 취임사를 준비할 당시 스피치라이터에게 게티스버그 연설의 '비밀'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을 정도로 링컨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당초 자신의 연설과 링컨의 연설이 비교당할 것을 우려해 게티스버그에서 연설하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측근들의 설득에 나중에 수락했고 그는 2년뒤 인권개혁법에 서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링컨을 가장 많이 닮고자 노력한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150주년 기념식(20일)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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