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학생인권, “그때 그때 달라요”
②김상곤과 거꾸로 가는 문용린, 학생인권 이념의 문제인가
교복을 입은 학생들 여럿이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교문으로 들어섰다.
교문앞에서 만난 김모 군은 학교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에는 웬지 더 위축된다고 했다. 김 군은 ‘오늘도 무사히…’를 되뇌며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심호흡을 했다.
김 군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문지도 교사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야, 너 이리 와봐.”
교사는 옆으로 빗어 넘긴 학생의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앞머리가 눈썹 밑으로 내려갔다. 벌점 2점이 매겨졌다.
이 틈을 타 다른 학생들은 교사의 눈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재빠르게 건물로 들어갔다.
서울 서대문구 한 중학교의 아침 등교 풍경이다.
지난해 1월 공포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에는 ‘학생은 복장, 두발 등 용모에 있어서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갖는다’고 돼 있지만, 등굣길 학생들의 두발을 점검하는 풍경은 이제 서울 중‧고등학교들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진보성향의 곽노현 전 교육감이 만들어놓은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보수성향의 문용린 현 교육감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인권’, 교육감 정치성향 따라 제각각
서울 학생인권조례에 따라 설치된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위원회는 지난 6월 문용린 교육감에게 학교 현장에서의 체벌 급증에 따른 교육감의 특단을 촉구하는 권고문을 전달했다.
서울 학생인권위에 따르면 학생인권교육센터에 접수된 상담과 민원은 지난 3월 130건에서 4월 169건으로 30% 정도 증가했으며, 이중 체벌을 비롯한 교사 폭력에 대한 상담건수는 같은 기간 38건에서 54건으로 42%나 급증했던 것.
인권위는 체벌 급증 요인으로 문 교육감 취임 이후 학생인권조례의 효력이 정지되고 체벌이 다시 허용됐다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교육감의 정치 성향에 따라 ‘학생인권’에 대한 척도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국 시‧도교육청별 학생인권조례 제정 상황을 보면 이 같은 현상은 극명하게 나타난다.
현재까지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고 있는 시‧도는 서울을 비롯해 경기도와 광주, 전북 등 4곳이다. 서울을 제외하고 나머지 3곳은 모두 진보성향의 교육감이 수장이다.
강원과 전남 역시 진보성향 교육감으로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지방의회의 반대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보수성향의 교육감이 자리하고 있는 시‧도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대표적으로 서울 문용린 교육감은 조례 개정 혹은 폐기를 위해 용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충북, 경남 등에서는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시민발의로 올린 조례안을 교육청이 각하시켰거나 의회가 부결시켰다.
이로 인해 전문가들 사이에선 학생인권과 관련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일선 학교들이 겪고 있는 혼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위원회 위원장)는 “학생들에게 교육감에 따라 법‧규칙이 바뀔 수 있다는 잘못된 법 상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대법원이 하루라도 빨리 판단을 내려줘야 교사와 학생들의 혼란을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학생인권조례 대법원 계류 중…혼란은 교사와 학생 몫
이처럼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학생인권조례의 명운은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가 지난해 1월 제기해 아직도 대법원에 계류 중인 조례무효소송의 결과에 달려 있다.
대법원이 조례무효 판결을 내리면 조례의 효력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조례무효소송은 대법원에서 단심재판으로 끝나 판결이 나올 경우 다른 불복절차는 없다.
어느 쪽으로든 결과가 나오면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갈등으로 긴 시간을 보낸 교과부와 시·도교육청, 시·도의회, 진보·보수 단체들 간의 긴 싸움은 끝나게 된다.
하지만 교사와 학생 모두 또다시 길고 긴 갈등과 혼란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