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제야 조금 한이 풀릴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고(故) 이동근씨의 아들 이정원씨는 14일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한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에선 몇 초간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졌다. 1969년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린 지 57년, 유족이 재심을 청구한 지 약 3년 만에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동근씨는 이미 1986년 세상을 떠났다. 함께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고 김호섭씨 역시 생전에 자신의 명예 회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지난달 30일 고(故) 이동근씨의 아들 이정원씨가 과거 군 첩보부대 활동 시절 찍힌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주보배 기자
춘천지법 강릉지원은 지난 8일 고 김호섭씨와 고 이동근씨 사건에 대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두 사람은 모두 1960년대 동해안에서 조업하다 북한에 납북됐다 귀환한 뒤, 군 보안부대와 수사기관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처벌받은 이들이다.
이동근씨는 1964년과 1965년 두 차례 동해상에서 조업 중 납북됐다 귀환했다. 당시에는 수산업법 위반 혐의 등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군 보안부대는 그를 '동해안 지구 고정간첩단 사건' 관련자로 지목했다. 수사기관은 이동근씨가 첫 번째 납북 당시 북한의 지령을 받은 뒤 두 번째 납북을 가장해 월북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당시 수사기관이 장기간 불법 구금과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해왔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역시 지난해 "보안부대가 수사권도 없이 영장 없이 체포·구금했고, 가혹행위를 했다"며 국가폭력을 인정하는 취지의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진실규명 결정이 곧바로 명예 회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한 건 2023년 6월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법원의 판단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기자회견과 탄원서를 통해 여러 차례 신속한 재심 개시 결정을 촉구해야 했다.
이정원씨는 "재심 결정을 들었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며 "3년을 기다렸는데 정말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이동근씨는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긴 수감 생활 동안 가족들의 삶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그는 1982년 출소했지만, 오랜 옥살이와 감시는 끝내 삶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출소 4년 뒤인 1986년, 그는 끝내 재심도 명예 회복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씨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검사들을 찾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이동근씨는 결국 재심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내가 죽으면 이 일을 너희가 어떻게 해결하겠느냐'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국가폭력의 여파는 가족 전체를 오래 짓눌렀다. 김호섭씨의 아들 김재문(가명)씨는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이 집안 전체를 따라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사촌들 중에는 (간첩 낙인으로 인해) 직장을 못 구한 아이들도 있었고 정신병원에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며 "지금도 말하려 하면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라고 했다. 당시 가족들은 국가기관 관련 직장은 물론 일반 직장 취업 과정에서도 반복적으로 좌절을 겪었다고 한다.
김씨는 "인적조회만 하면 다 걸렸다"며 "국가보안법 때문에 국가 관련 직장은 아예 들어갈 수도 없었고, 들어가도 서류 심사에서 다 잘렸다"고 말했다. 경찰 정보과 직원들의 감시도 이어졌다고 했다.
"정보과 사람들이 늘 집 주변에 있었어요. 어디 출장만 가도 따라다니고 뒷조사하고…. 항상 감시받는 느낌이었죠."가난 역시 가족들을 오래 괴롭혔다. 이정원씨는 "아버지가 감옥에 간 뒤 어머니는 풍을 앓아 몸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며 "우리는 며칠씩 굶기도 했다"고 말했다.
말을 마친 뒤 그는 잠시 침묵했다. 수화기 너머로 거칠어진 숨소리만 짧게 들렸다. 그는 결국 배를 타며 생계를 이어갔다. 다른 직업을 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했다.
"간첩 자식이라는 낙인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배 타는 일 말고는 길이 없었죠."
지금은 뇌출혈 후유증으로 기초생활수급비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더라도 실제 재심과 명예 회복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사례는 여전히 적지 않다. 과거사 사건 피해자 상당수는 고령이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이고, 유족들 역시 긴 시간 재판 지연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씨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고 싶어도 법원 결정이 계속 미뤄지니 답답해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이제라도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재문씨는 "부모님은 이미 다 돌아가셨다"며 "그래도 이제라도 누명을 벗겨드릴 수 있다면 그걸로 고맙다"고 말했다.
이정원씨 역시 인터뷰 말미에 다시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모든 게 끝나가는 것 같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한참 뒤에야 다음 문장을 꺼냈다.
"그때(재심에서 무죄 결론이 나면)는 아버지한테 말하고 싶어요. 이제야 조금 한이 풀렸다고."
두 어부의 재심 개시 결정은 내려졌지만 아직 재판 기일은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