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물쇠가 걸린 자동심장충격기(AED). 김대한 기자 "쓰라고 가져다 놓은 것이 맞나요." 지난 27일 오전 기자는 모악산을 찾았다. 갑작스러운 등산의 이유는 모악산 수왕사 내 자동심장충격기(AED)에 "자물쇠가 채워져있다"는 제보가 있어서다.
"삐-삐" 통화연결음 소리만…'무용지물' 비상호출벨
최단 등산코스를 찾았다. 목표는 모악산 관광단지 주차장을 시작으로 대원사를 지나 수왕사까지다. 주차장부터 수왕사까지는 2.5㎞ 내외로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정상까지는 수왕사에서 약 40~50분 더 걸린다.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맥박이 빨라졌다. 운동 부족을 자책하고 있을 찰나, 대원사를 30여 분 앞둔 지점에서 비상호출벨을 발견했다. 비상호출벨은 위급할 때 경비실과 관리사무소, 경찰 등에 연결해 도움을 요청하는 장치다.
벨을 눌렀다. "삐-삐" 통화연결음 소리가 들렸다. '막상 연결되면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비상상황이 아닌데 눌러서 죄송하다고 해야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경찰과 관리사무소 그 누구도 연결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3차례 벨을 눌러보고 2분여를 더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등산로와 공중화장실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발생하는 범죄와 위급 상황 발생 시 즉각적인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도입된 비상호출벨은 그저 보여주기식 장치였다.
위급 시 경비실과 관리사무소, 경찰 등에 연결해 도움을 요청하는 '비상호출벨'. 김대한 기자유일 안전장치 자동심장충격기(AED)…전시용 전락
다시 발걸음을 옮겨 대원사를 지나 수왕사로 향했다. 출발한 지 약 1시간 30분 정도가 지나서야 문제의 전시용 자동심장충격기를 만날 수 있었다.
실제 빨간색 네모난 캐비닛 안에 자동심장충격기가 있었지만, 두 개의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었다. 0000과 1111 등 이리저리 비밀번호를 맞춰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또 인근에는 오래전에 사용됐을 것으로, 아니 전시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동심장충격기 캐비닛이 버려져 있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분석 결과, 지난 2010~2014년 국립공원 내 사망사고 124건 중 심장질환(심장마비, 심장돌연사)으로 인한 사망이 60건으로, 약 50%를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심정지 발생 후 4분은 뇌 손상을 막고 생존율을 극적으로 높이는 골든타임으로 알려져 있다. 4분이 지나면 뇌세포 손상이 시작되고, 6분 후 생존율은 20% 이하로 급감한다.
이처럼 위급 시 기댈 수 있는 것은 주변 사람의 심폐소생술과 자동심장충격기뿐이다. 하지만 모악산에서 마주한 현실은 소생을 기대하기 어려운 전시용 장치뿐이었다.
전북소방본부 관계자는 " 수왕사 인근서 구조 요청 시 완주소방서 구이119안전센터에서 출발해 도보로 이동할 경우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된다"며 "헬기 구조시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수왕사 인근 버려진 자동심장충격기 캐비닛. 김대한 기자보여주기식 안전장치의 이유…"관리 편하라고?"
심정지 발생 시 심폐소생술(CPR)만 시행했을 때보다 자동심장충격기를 병행하여 사용할 경우 환자의 생존율은 약 3배 이상 높아진다.
1분 1초가 급한 골든타임 내에 사용되는 자동심장충격기는 생명을 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모악산 내 안전장치는 사용법만 친절하게 안내돼 있을 뿐 정작 사용할 수 없었다.
완주군 모악산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자물쇠를 걸어 놓지 않으면) 관리가 어려운 탓에 걸어두었다. 즉시 통화연결을 할 수 있도록 번호 부착을 조치해 통화 시 비밀번호를 알려주도록 하겠다"며 "비상호출벨 역시 재점검하겠다"고 말했다.
자동심장충격기는 '관리'보다 즉시 접근성이 훨씬 더 중요한 장비다. 관리의 편의성을 위해 자물쇠로 잠가두는 등 도입 취지를 벗어났음에도, 관리자 측은 여전히 자물쇠를 고집하고 있는 상황이다.
매주 월요일 모악산을 찾아 수왕사까지 산을 오른다는 이모(50대)씨는 "쓰라고 만들어 놓은 건지 그냥 가져다 놓은 건지 모르겠다"며 "어디서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닌 거 같다"고 혀를 끌끌 차며 산을 내려갔다.
한편,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등산사고가 총 9172건 발생해 2509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4월은 전월 대비 등산사고가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하는 달로, 947건의 등산사고가 발생해 183명이 사망하거나 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