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가 발생한 아리셀 공장. 박종민 기자공장 화재로 23명의 사망자를 낸 혐의로 기소된 아리셀 박순관 대표가 항소심에서 대폭 감형된 형을 선고받은 가운데, 유족 합의와 대형 로펌 선임이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을 무력화시키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징역 15년→4년 대폭 감형…유족 합의 반영
아리셀 공장 화재 당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박순관 대표. 박종민 기자23일 CBS 노컷뉴스를 종합하면 수원고법 형사1부는 전날 중처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박순관 아리셀 대표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 1심을 파기하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도 징역 15년에서 7년으로 감형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23명이 사망한 중대한 사고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 유족 전원과 합의가 이뤄진 점 등을 주요 감형 사유로 반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사망한 피해자 유족들 전원에게 피해를 변제하고 합의했고, 상해를 입은 피해자들과도 모두 합의했다"며 "일부 피해자 유족들이 처벌을 탄원하고는 있으나 합의를 양형에 제한적으로 반영하게 되면 피고인으로 하여금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을 소극적으로 하게 하거나 급기야는 이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유족과의 합의는 중처법 위반 사건에서 핵심 감형 요소로 작용해 왔으며, 이번 판결에서도 형량을 낮추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망자가 20명을 넘는 대형 참사에서도 형량이 크게 낮아지면서 중처법의 실효성 논란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유족 합의·대형 로펌 선임…기존 패턴 답습

중처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기업들에서는 유족과의 합의와 대형 로펌 선임을 통해 형량을 낮추는 방식이 반복돼 왔다.
수사 초기부터 대형 로펌과 전관 출신 변호인을 앞세워 대응하고, 유족과의 합의를 통해 처벌 수위를 낮추는 전략이 사실상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는 지적이다.
아리셀 역시 사고 직후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인단을 선임하고, 기소 이후에도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에 대응하는 한편 유족과 합의에 나서는 등 감형 요소를 쌓아왔다.
특히 안전 설비 개선이나 조직 개편 등 실질적인 재발 방지 조치보다는 법률 대응과 합의에 집중한 점도 기존 사례와 닮았다는 평가다.
이 같은 구조가 반복되면서 중처법이 본래 취지인 '경영 책임자 처벌'을 통해 산업재해를 예방하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조계·유족 반발…"또 솜방망이 처벌"
수원고법에서 열린 아리셀 박순관 대표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 혐의 사건 항소심 선고 이후 유족 측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결국 이번 항소심 결과 역시 그동안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법조계와 유족 측에서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유족들은 항소심 선고 직후 입장문을 내고 "아리셀에서 사망한 피해자들은 대부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던 이들"이라며 "참사 이후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생계 문제까지 떠안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생계를 위해 불가피하게 합의한 유가족에게 '합의했으니 처벌을 낮춘다'는 것은 결국 법원이 '돈 앞에 정의는 없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아리셀 참사대책위 법률지원단 손익찬 변호사도 "중처법 취지와 피해자들의 현실을 고려하면 유족과의 합의를 감형 사유로 보기보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를 가중 처벌 요소로 봐야 한다"며 "이번 형량은 지나치게 가볍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되면 산업재해 처벌 전반이 약화되고, 결국 중처법의 실효성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