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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등록증 있어요?"…범죄 사각지대 놓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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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아닌 '경계에 선 사람들'③]

일자리 찾아 부산행…대출 빌미로 휴대폰 4대 개통 피해
대출업자·대리점 "장애인 등록증 있나"…책임 회피 구조
수사기관 "기망행위 없음"…법·제도 보호 공백 드러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도 노출…"경계선, 있지만 없는 존재"

AI 생성 이미지AI 생성 이미지
▶ 글 싣는 순서
①"윈도 95처럼 버퍼링이"…일할수록 밀려난 청년
②"멀쩡한데요"…서류와 눈앞이 다른 아이의 엄마
③"장애인 등록증 있어요?"…범죄 사각지대 놓인 사람들
(계속)

홍정화(21·가명)씨는 전주가 질렸다. 그동안 이곳에서 구한 일자리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더 큰 도시로 가고 싶었다. '부산 같은 곳에는 내가 일할 곳도 있겠지.' 정화씨는 지난해 4월 부산행을 결심했다.

처음 한 달만 버틸 돈이 있으면 이후에는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에서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짜리 원룸을 찾았다. 정화씨는 어머니에게 "자취하고 싶다"며 손을 벌렸다.

"아들이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고 싶다고, 전주는 이제 싫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동네가 너무 가난하고 작다고." 어머니인 송주연(58·가명)씨가 말했다. "나는 안 보내준다고 했죠. 혼자서 어떻게 생활하겠어요."

떠나고 싶었던 정화씨는 돈을 마련할 방법을 궁리했다. 인터넷에 '소액대출'을 검색하자 수많은 광고글이 나왔다. 정화씨는 그중 하나에 연락처를 남겼다.


아이폰16 프로 4대 개통시킨 대출업자…"대출 과정인 줄"

"얼마가 필요합니까." 대출업자에게 곧 연락이 왔다. "140만 원? 그 정도는 한 번에 빌려줄 수 없어요. 70만 원씩 두 번 나눠서 줄게요."

대출업자는 다음 날 오전 집 앞으로 찾아와 정화씨를 데리고 30분 넘게 걸리는 전북 익산의 한 휴대폰 대리점으로 갔다. 이곳에서 정화씨 명의로 당시 최신 기종인 아이폰16 프로 2대를 개통했다. 한 대당 약 200만 원, 총 400만 원 상당이었다.

"나머지 70만 원은 내일 줄게요." 대출업자는 아이폰 두 대를 가져가며 정화씨에게 70만 원을 건넸다.

다음 날 또 다른 대출업자가 정화씨를 데리고 전주 시내 대리점을 찾았다. 같은 방식으로 최신형 아이폰 2대를 개통했다. 그 사람도 휴대폰은 가져가고 70만 원을 건넸다. 이틀 동안 개통된 휴대폰은 4대, 총 800만 원 상당이었다.

"대출해 준 140만 원은 월 6만 원씩 24개월 할부로 계좌에서 빠져나갈 거예요." 대출업자는 설명했다.

"대출을 받는 당연한 과정의 일부인 줄 알았죠." 정화씨가 말했다. 한 달에 6만 원씩 24개월이면 144만 원.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정화씨는 대출도, 사회생활도 해본 적이 없었다.

휴대폰 개통 신청서. 정화씨 측 제공휴대폰 개통 신청서. 정화씨 측 제공

대출업자 "장애인 등록증 있나? 그럼 취소해 줄게"

아들이 대출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주연씨는 처음에는 일반적인 소액 대출인 줄 알았다. "당장 이자 내고 돌려줘라"고 했지만, 휴대폰 개통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연씨는 대출업자에게 직접 전화했다. "우리 아이가 경계선 지능이에요. 학교 다닐 때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하지만 한 번만 봐주세요. 받은 돈은 그대로 돌려드릴 테니, 개통한 휴대폰은 돌려주세요."

"장애인 등록증이 있나요?" 대출업자가 물었다. "등록증 사진 찍어서 보내면 취소해 줄게요. 그리고 우리는 휴대폰 없습니다. 이미 다 넘겼어요."

주연씨는 정화씨와 함께 휴대폰을 개통했던 대리점도 찾아갔다. 아들의 상황을 설명하며 환불을 요구했다.

"아들이 성인이잖아요. 직접 사인했고요. 저희는 불법적인 건 없습니다." 대리점 직원이 말했다. 이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장애인 등록증이라도 있어요?"

경계선 지능인(느린학습자)은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등록증이 없다.

법무법인 원곡과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임한결 변호사는 이에 대해 "장애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면 장애인 학대 범죄로 분류돼 가중 처벌 대상이 된다"며 "지적장애로 등록돼 있으면 계약 성립 자체가 문제 될 수 있지만, 경계선 지능인은 그야말로 사각지대"라고 설명했다.

정화씨의 지능지수(IQ)는 71이다. 지적장애 기준인 70과 1점 차이다. 고등학교 때 심리 검사를 받았지만, 병원에서는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라 검사에 집중하지 못해 낮게 나왔을 수 있다"고만 했다. '경계선 지능'이라는 말은 언급조차 없었다. 정화씨와 주연씨가 경계선 지능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입대 전 신체검사 때였다.


경찰에 고소했지만 '기망행위 없음'…이의신청도 기각

주연씨와 정화씨는 전북 전주덕진경찰서에 대출업자와 휴대폰 대리점 직원들을 고소했다. 수사 과정에서 정화씨는 단독으로 조사를 받았다. 발달장애인이라면 전담 수사관 배정이나 신뢰관계인 동석 등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경계선 지능인에게는 이런 장치가 적용되지 않는다.

약 한 달 뒤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기망행위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수사관에게 '왜 기망행위가 아니냐', '엄연히 사기 아니냐'고 따졌죠." 주연씨가 말했다. "그랬더니 '왜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느냐'면서 억울하면 이의신청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불송치 결정에 불복했지만 전주지검 역시 같은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결국 주연씨는 휴대폰 4대의 기기값과 위약금 등 총 약 840만 원을 갚았다. "경계선 지능이라고 마냥 놓을 수는 없잖아요." 주연씨가 말했다. "어디 취업이라도 시키려면 신용불량자를 만들면 안 되니까요."

정화씨는 이의신청서에 이렇게 썼다. "저는 돈이 필요해서 인터넷으로 사채를 알아봤을 뿐, 휴대폰 개통이나 매매를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인 경계선 지능인의 취약점을 이용해 사기를 저지른 행위를 불송치하면, 사기꾼들은 앞으로도 계속 사기를 칠 것입니다."


불송치 이의 신청서. 정화씨 측 제공불송치 이의 신청서. 정화씨 측 제공

믿었던 선배가 절도 지시…"경계선, 있지만 없는 사각지대"

경계선 지능인은 범죄 피해자가 되기도 하지만, 타인에 의해 범죄에 연루되기도 한다.

한국보건복지인재원이 2022년 발간한 '경계선지능청년의 정책소외 실태 및 정책개발' 보고서에서 연구진은 "경계선 지능인들은 다양한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으며, 이는 피해와 가해가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분석했다. 가해자로 연루된 경우, 그 과정에서 영향을 준 사람은 '친구, 연인, 선배'가 가장 많았다.

고등학생인 최정선(가명)군도 믿었던 선배의 말을 따르다 범죄에 휘말렸다. 지난해 선배가 길가에 서 있는 고가의 자전거를 가리키며 "내 거니까 가져다줘"라고 하자 의심 없이 말에 따랐다.

정선군 말고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었지만, 눈치가 빠른 아이들은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정선군과 친구 한 명만 남아 자전거를 끌었다. 300미터도 가지 못해 신고를 받은 경찰이 나타났다. 선배의 자전거가 아니었고, 절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어머니인 김소연(50·가명)씨는 경찰에 정선군의 심리검사 결과지를 보여주며 경계선 지능인임을 호소했다.
"이 서류를 보여줘도 경찰은 '이렇게 말을 잘하는데 이런 경우가 있나'라고 하더라고요."

정선군은 지능검사에서 매번 경계선 지능으로 나오지만, 처리 속도가 빠르고 대화를 유창하게 해 겉보기에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경찰도, 학교 교사도 서류를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다.

결국 정선군은 별다른 법적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합의에 내몰렸다. 합의금만 수백만 원이 들었다.

"경찰도, 변호사도 만약 장애인이었다면 지원이 있었을 거라고 했어요." 소연씨가 말했다. "그런데 경계선 지능인은 장애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느린학습자시민회 조윤경 사무총장(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장)은 경계선 지능인의 처지를 "있지만 없는 사각지대"라고 표현했다.

"전세 사기를 당한 경계선 지능 청년이 온 적 있어요. 법률구조공단에 전세 사기 피해 지원 사업이 따로 있는데, 경계선 지능 청년은 설명이나 자료를 잘 이해하지 못해 실질적으로 지원을 받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장애 관련 권익옹호기관에서도 장애 판정이 되지 않아 도움을 받을 수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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