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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지 않은 '휴민트' 류승완에게 미래는 있다[영화한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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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세상 모든 영화는 알맹이를 품었다고 믿습니다. 껍데기는 차근차근 벗겨 내고 알찬 것들만 골고루 건져 올렸습니다. 지금 여기, 먹음직스럽게 간추린 알맹이들로 한상 가득 푸짐하게 차린 영화 한끼 대접합니다.

류승완 감독 신작 '휴민트'를 미리 봤습니다

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 제공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 제공
어떤 영화들은 사회실험과 유난히 닮았다. 류승완 감독 작품이 그러하다. 근작 '휴민트'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사회실험 하나를 먼저 살펴보자.

1961년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1933-1984)은 한 실험에 지역 주민 1천여명을 참여시켰다. 그는 주민들에게 '실수할 때마다 처벌을 받으면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가설을 증명하려는 실험이라고 설명했다.

참여 주민들은 기업회장, 교사, 점원, 기술자, 상인 등 그 면면도 다양했다. 이들은 전기충격기에 연결된 사람에게 문제를 냈다. 상대가 문제를 맞추지 못하면 직접 버튼을 눌러 전기충격을 줬다. 문제를 틀리는 횟수가 늘수록 전기충격 강도 역시 높여야 했다.

주민들은 전기충격으로 괴로워하는 상대를 보면서 그 강도를 높이는 데 머뭇거렸다. 그러나 흰 가운을 입고 뒤에서 지켜보는 실험자의 재촉에 결국 강도를 높여 갔다. 무려 실험 참여자들 가운데 65%가 전기충격 버튼을 최고 강도까지 눌렀다.

놀랍게도 이 실험에서 주민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배우였다. 물론 전기충격기도 가짜였다. 한 편의 연극과도 같았던 이 실험의 진짜 목적은 '권위에 대한 복종'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 인류가 벌여온 악행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 제공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 제공

사람에 의한 정보 수집 활동, '휴민트'라는 변수


영화 '휴민트'는 북한 고위 권력층과 러시아 마피아의 범죄 커넥션에 얽혀 들어간 두 남북 특수요원 그리고 이들을 잇는 한 여성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 여정은 유독 험난하고도 애절하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이 시대를 살아내야 할 우리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두 팔 벌린 채 기다리고 있다.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 작품답다. 화려한 액션의 외피를 한 꺼풀 벗기면 진짜 알맹이가 보이는 까닭이다. 미완의 역사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지금을 사는 우리네 자화상이 바로 그것이다.

국경 너머 치열한 외교 전쟁이 벌어지는 세계에서 '정보'(intelligence)는 늘 최고의 무기로 꼽힌다. 그러하기에 그 정보를 얻고자 천문학적인 돈을 들인 첨단 장비까지 동원하면서 치열한 첩보 활동을 벌이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human)은 늘 정보 수집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른바 '스파이'다. 당연한 일이다. '먹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니, 맥락을 읽어낼 줄 아는 스파이는 늘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으리라.

사람에 의한 정보 수집 활동, 그러니까 '휴민트'(humint=human+intelligence)는 어제도 유효했고, 지금도 유효하고, 내일도 유효할 것이다. 다만 그 첩보 활동 주체가 사람이라는 데서 늘 변수를 염두에 둬야만 한다. 이는 영화 '휴민트' 속 인물들을 격랑 속으로 몰아넣는 요소이기도 하다.

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 제공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 제공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분단' 사회실험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들 말한다. 명령어를 집어넣는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는 까닭이다.

'과연 그 명령은 합당한가' '나의 신념에 부합하는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닌가'와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가치 판단 절차가 늘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의 영역'이다. 영화 '휴민트'는 그 사람의 영역을 다룬다. "진짜 우리 이거 밖에 안 됩니까"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겠소" 등 극중 인물들 대사는 그 방증이다.

일본 제국주의 탓에 나라를 잃고 35년 동안 안팎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인 사람들이 있다. 1945년 광복이 왔건만, 한반도는 끝내 남북으로 갈라졌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남과 북은 여전히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러시아 쪽으로 넘어간 독립운동가들 활동 거점은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류승완 감독은 '휴민트'를 통해 남과 북 사람들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러들였다. 처절한 갈등이 혹독한 추위로 각인된 듯한 그 상징적인 공간에서 그는 다시 한번 흥미로운 사회실험을 벌인다.

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 제공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 제공

미처 청산 못한 역사의 굴레, 그 속죄와 구원


극중 국정원 요원 조과장(조인성)과 북측 국가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은 스스로 용납 못할 죄를 품고 있다. 사람의 도리와 직결된 그 죄는 이 두 사람이 몸담은 나라와 조직의 권력자들 이해관계 탓에 아물지 못한 채 남겨진 상흔이다.

"이 바닥에 믿음이 어딨니?" "니가 지금 우리 공화국에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아니?" 같은 극중 대사가 그 근거다. 물음을 가장한 이 폭력적인 질책은 조과장과 박건이 사람의 도리를 외면하게끔 강요해왔다.

조과장과 박건은 새로운 임무를 맡고 블라디보스코트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를 만난다. 북측 권력층과 러시아 마피아가 결탁한 반인륜적인 범죄를 목격한 이들 세 주인공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영화 '휴민트'는 속죄와 구원의 서사다.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굴레를 짊어져야만 했던 극중 주인공들이 그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길을 열어가는 까닭이다. 이들은 부조리한 시스템 탓에 아름다운 시절을 한껏 누리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들의 처절한 생존 투쟁은 더욱 간절하고 눈물겹다.

그렇게 미완으로 남아 있던 현실의 부조리 청산은 이 영화 속에서나마 완결된다. 그 속죄와 구원의 서사가 건네는 감동은 '분단' '계급' '성상품화' 같은 현실의 구조적인 부조리를 극복해 나갈 영화적 힘으로 다가온다.

영화 '휴민트' 포스터. NEW 제공영화 '휴민트' 포스터. NEW 제공

수미쌍관 미학…우리 시대 '휴민트들' 향한 헌사


앞서 모두에 소개한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그 이면에 또 다른 얼굴을 숨기고 있다. 바로 '저항'이다.

해당 실험에서 "전기충격 강도를 더 높이라"는 권위자 명령을 끝내 거부한 35%의 주민들이 있었다. 이들 역시 실험을 완수해야 한다는 '대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기충격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대의란 무엇일까. 소수 권력자들 욕망을 채우려고 만들어진 시스템에 복종하고 희생하는 것은 결코 대의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저항해야 할 부조리다. 다만 "살고 싶다" "살 방법이 없냐"는 우리네 이웃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대의일 수는 있다고 이 영화는 웅변한다.

류승완 감독 전작에서 익히 봐왔듯이, 다양한 소품을 활용한 타격감 넘치는 액션신은 영화 '휴민트'만의 특별한 볼거리다. 분단 서사를 공유하는, 전작 '베를린'(2013)과 이어지는 세계관도 깨알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허름하고 습하며 어둑한 곳에 둥지를 튼 주인공의 모습은 몹시 인상에 남는다. 눈에 띄지 않는 음지에서 우리네 안락한 삶을 지켜 주는 이들에 대한 헌사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이렇듯 영화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알려온 류승완 감독 또한 우리 시대 '휴민트'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119분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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