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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끝판왕이 모니터를 뚫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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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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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연합뉴스
기사 제목이나 첫 문장에는 핵심 소재와 전반의 요약이 압축적으로 담겨야 했다. 뉴스 소비자의 시선을 끌 만한 표현이 무엇인지, 그러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글쓰기는 무엇인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이 숙명이었다. 기자 초년병 시절이던 19년 전에도 그랬고, 아마 그 앞 세대도 비슷했을 것이다. '개가 사람을 문 게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물었다' 수준의 강렬한 팩트가 없다면, 어떻게든 기사가 읽힐 수 있도록 제목에서부터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해야 했다.

인터넷 포털이 뉴스 소비의 중심이 되자 제목에 요구되는 취지는 비슷하되 양상은 조금 더 말초적으로 변했다. 이제는 고리쩍 은유처럼 느껴지는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서 소비자들을 '낚아 올려야'(Click-bait) 했기 때문이다. 제목에는 미심쩍은 정념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헐', '대박', 'OO녀', '충격' 같은 표현들이 전통의 레거시 언론에까지 등장했다. 사태가 이쯤 되니 "자네들,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린가"라며 꾸짖으며 무덤에서 일어날 선배들의 노호(怒號)가 들리는 듯도 했다.

급기야 뉴스가 유튜브라는 거대 플랫폼에 종속되고, 한 시도 자극에서 벗어날 수 없는 스마트폰 환경에 놓였다. 과거 기사 제목에 '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어색했건만, 자극을 향해 폭주하는 유튜브 생태계에서 그 정도는 감정의 기복조차 느껴지지 않는 애교 수준이 됐다. 기존 언론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개인 유튜버들까지 뉴스 혹은 그와 유사한 콘텐츠를 생산하며, 낚아야 할 소비자는 이제 '정보의 바다'가 아닌 '정보의 우주'에 흩어져 있다. 넘쳐나는 정보에 비해 소비자의 관심은 턱없이 부족하니, 뉴스 생태계가 이른바 '주의력 경제(Attention Economy)'에 완벽히 장악당한 지도 오래다.

무한 강호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은 감정의 진폭이다. 그냥 분노가 아니라 벼락같은 격양이어야 하고, 그냥 슬픔이 아니라 처절한 비애여야 하며, 그냥 즐거움이 아니라 철저한 쾌락이어야 한다. 알고리즘의 신이 인도하는 길은 더 큰 자극뿐이다. 유튜브 섬네일 상당수가 문자 그대로 활활 불타고 있는 이유다. 언론의 사명과 본분을 지키려는 태도는 이 무자비한 생태계에서 종종 약점이 되곤 한다.

감정 과잉으로 점철된 모니터 속 세계. 여기가 마지막 스테이지인 줄 알았는데, 이 세계의 문법이 화면을 뚫고 현실로 쏟아져 나온 게 지금 시대다. 게임 속에서 끝내 쓰러뜨리지 못했던 '끝판왕'이 눈앞에 서 있는 격이다. 모니터 밖으로 진출한 강렬한 분노는 하룻밤 사이 한 인간을 나락으로 보낼 만큼 위력적이다. '유명해지기 무섭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갈등을 중재해야 할 공간에 뻗친 이 끝판왕은 우리의 법과 정치마저 집어삼켰다. 정쟁의 현장이었던 국회 법사위와 과방위에서조차 이제 메시지는 사라지고 감정만 남았다. '사자후', '극대노', '참교육' 같은 과격한 언사가 동반될 때만 뉴스로 선택받는 지금, 우리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 결말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안심하시라. 오늘의 이 처절한 분노 역시 내일이면 더 센 자극에 밀려 시시해질 테니까. 자극의 역치가 천장을 뚫고 올라간 시대, 무감각해지는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냉소하는 것만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품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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