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 가맹사업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시작하자 여야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충돌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으셨나 보죠." 여권 인사 A씨가 9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토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강제 중단시킨 우원식 국회의장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진영 논리로만 사안을 판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란전담재판부 신설엔 반대했다. 우 의장의 출신을 고려해 그가 어느 편에 설지 예단했다가 스스로 민망했던 이유다. 덕분에, 우 의장이 연단에 선 나 의원에게
"나경원 의원, 인사 안 합니까?"라며 불쾌한 감정을 굳이 드러낸 이유도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A씨가 나 의원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작심한 '인사 생략' 역시 계획된 도발이 아닌지 의심된다고 했다. 국민의힘이 입법 저지를 시도한 가맹사업법은 가맹점주들의 협상권을 보장하는 비쟁점 법안이란 점에서 '민생 발목 잡기'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참작해도 "의장님이 과했다"는 게 그의 관전평이다.
5선 중진을 가르치듯 국회법 해설집을 읊어준 것은 웃어 넘긴다 해도, 마이크 전원을 아예 꺼버린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재임 기간 우군인 국민의힘과도 불화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입틀막'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이었다.
국민의힘 관계자 B씨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우 의장의 행동에 대해 "선출직 욕심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B씨 외에도, 12·3 비상계엄 1년을 맞아 책을 펴내고 '다크투어' 해설사로 나섰던 그의 행보를 '당권 또는 대권'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최근 정치권에 부쩍 늘었다.
좌우간 이렇게 여야를 막론하고, 의장의 느닷없는 참전이 어쩐지 부자연스럽다는 목소리가 많다. 정치적 사심에 선을 넘은 게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현재 우 의장에겐 당적(黨籍)이 없다. 국회법 제20조의2는 의회의 수장인 국회의장에 대해 당선 즉시 특정 정당 소속을 벗어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야의 첨예한 대립을 중재하고 최선의 합의안을 도출해야 하는 게 의장의 책무이기 때문에 최대한 중립을 지키라는 것.
그러나 이번에 우 의장 리더십에 의문부호가 붙게 한 게 바로 그 '중립성'이었다. 우 의장이 나 의원의 발언권을 제한하며 내세운 근거가 여야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 의장은 나 의원이 '의제와 관계없는 발언'을 한단 이유로 '허용범위 내' 토론을 하라고 압박했다. 물론 나 의원이 내란전담재판부 등 '사법파괴 5대 악법' 철회를 요구하며 가맹사업법과 관계없는 발언을 이어간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는 본회의가 시작됐을 때부터 예견된 바다. 우 의장의 주재 아래 열린 막판 회동에서도 양당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을 향해 '무제한 토론은 필리버스터 제한법(국회법 개정안) 같은 쟁점법안에 대해서만 해도 되지 않겠냐'고, 설득할 의무는 과연 집권 여당만의 것이었을까. 부의안과 무관한 발언은 금지된다는 우 의장의 설명은 절반만 맞다. 가령 지난해 7월 추미애 의원은 한국교육방송공사법(EBS법) 필리버스터 도중 광고 노래를 개사한 '김건희 저격송'을 불렀다. 제지는 물론 없었다. 국민의힘이 '민주당 의원들의 마이크는 왜 안 껐느냐'고 반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의힘 곽규택 의원이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0회국회(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규탄하는 피켓을 두고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에 대한 무제한토론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무엇보다, 필리버스터는 소수야당의 발언권 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다. 도입 취지를 고려하면, 우 의장이 언급한 국회법 102조(의제 외 발언의 금지) 적용도 원천 배제해야 맞지 않을까. 미국에서도 2013년 테드 크루즈 연방상원의원이 21시간 넘게 발언하며 동화책을 읽은 전례가 있다.
우 의장이 마이크를 뺏은 나 의원의 처지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최악의 상임위원회로 꼽히는 법사위에서 약 넉 달째 '야당 간사 내정자'를 맡고 있는 중이다. 추미애 법사위원장에 의한 국민의힘 발언권 제한은 이미 일상이다. 12일 필리버스터에 나선 같은 당 송석준 의원도 "법사위에서 무시당하다가 여기 오니 가슴이 뻥 뚫린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우 의장으로서는 'DJ 이후 61년 만의 소수야당 입틀막'이라는 프레임이 억울할지 모른다. 계엄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으면서, '여당이야말로 진정한 입법내란 세력'이라고 항변한 나 의원 주장에 동의할 리도 만무하다.
그렇다면 최소한 '필리버스터 13분 만에' 야당 의원의 발언권을 박탈해 공격의 빌미를 주는 일만큼은 피했다면 어땠을까. 마이크를 끄고 켜기를 반복하다가, 종내 정회 선포에 이른 촌극은 여야간 감정의 골만 더 깊게 만들었다.
마이크 전원만 내린다고, 우 의장이 부끄러워한 "국회의 창피한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964년 공화당 출신 이효상 의장이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이크를 껐을 때조차, 동료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한 DJ의 필리버스터는 무려 5시간 19분 동안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