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민 기자12·3 불법 비상계엄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한국 사회를 일시에 후퇴시킨 사태 자체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 엘리트 관료집단의 부끄러운 민낯을 여실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을 이만큼의 위치로나마 이끄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것으로 여겨져온 이들은, 그러나 이번에 능력과 도덕성 모두에서 심각한 치부를 드러냈다.
이들의 무능과 비루함은 문(文) 무(武)를 가리지 않았다. 그 중 누구 하나도 "내 탓이오" 외치며 목숨 내걸고 책임지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더욱 참담했다.
"모든 책임 진다"던 국방장관의 표변…계엄사령관은 무지, 나약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윤창원 기자대한민국 무관의 명예와 자부심에 먹칠한 것은 김용현(육사 37기) 전 국방장관이 대표적이다. 그는 사태 초기에는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더니 얼마 뒤 언제 그랬냐는 듯 표변했다.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등의 지시 여부를 놓고 변명을 하거나 아예 부하 책임으로 떠넘겼다. 그의 화려한 변호인단이 진가를 발휘한다면 곽종근 특전사령관이나 김현태 707특임단장 등이 더 무거운 형벌을 짊어질 판이다.
박안수(육사 36기) 전 육군참모총장의 경우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국민들을 심란케 한다. 본인 주장대로라면 12·3 사태 당시 얼떨결에 몇 시간짜리 계엄사령관 노릇을 했다.
그 역시 공포탄 사용 건의 등과 관련해 부하 탓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육군의 수장답지 않은 무지와 나약함이 더 따가운 비판을 받았다.
그는 지난 3월 첫 공판에서 "김 전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면 현장에서 항명죄 현행범으로 체포됐을 것"이라며 "명령에 따른 것은 위법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강요된 행위를 한 것이므로 처벌할 수 없다"고 변호인을 통해 주장했다.
엘리트 육사 출신 최고위 장교가 계엄의 엄중함을 잘 알지 못했고, 상관 명령에 토를 달 용기조차 없었음을 부끄러움도 없이 실토한 것이다.
이는 윤석열·김용현 계보인 '충암파' 핵심 여인형(육사 48기) 전 방첩사령관 등도 마찬가지. 그는 12·3 사태 전 국회 국정감사 때만 해도 계엄을 머리 속에 그린 듯 오만방자했지만, 법정에선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에 급급했다.
40여년 전 서슬 푸르던 전두환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에도 분연히 맞섰던 장태완, 정병주 같은 장군들의 기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희생 덕에 자라난 인권과 법치의 혜택을 정작 내란 피고인들이 향유하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한 예비역 영관 장교는 "쿠데타가 됐든 비상계엄이 됐든 군인이 총을 들고 나섰다면 생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며 "별 3개 4개씩이나 달고 군에서 온갖 혜택을 다 누린 사람들이 저런 구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괴롭다"고 말했다.
尹도 체면불구 부하에 책임 돌리다 국정원 부하에게 "피고인" 일갈 수모
윤석열 전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일시나마 역사를 후퇴시키고 국격을 훼손한 12·3 사태의 책임은 문민 관료에게도 똑같이 부여된다. 수백년 이어져온 문민 우위의 전통은 조선 선비의 서릿발 같은 결기를 지금도 요구한다.
무사(武士)나 문사(文士) 모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꼭대기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덕목을 갖춰야 했다. 큰 권한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12·3이란 블랙 코미디 같은 비극의 주인공은 단연 윤석열 전 대통령이다. 그의 망상적 난폭함과 뉘우침 없는 철면피는 내란 1년째를 맞는 여태 어두운 그림자로 어른거리며 미래로 나아갈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무엇보다 목불인견인 것은 염치고 체면이고 없이 부하 탓을 하며 제 살 궁리에 바쁜 행색이다. 그들은 한때 심복이자 흉금을 터놓고 폭탄주를 돌리며 '비상대권'을 운운했던 사이다.
그 허다한 난행 중에서도 압권은 지난달 20일 공판이다. 그는 증인으로 나온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의 공방 도중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수사의 시옷(ㅅ)자도 모르는 사령관이라는 놈"이라고 하는 둥 막말 비하를 일삼았다. 자신의 불법 지시를 덮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는 결국, "저 대통령 좋아했다. 시키는 거 다 하고 싶었다"고 했던 또 다른 옛 부하 홍 전 차장으로부터 "피고인"이라는 호명과 함께 "부하에게 책임 전가하느냐"는 일갈을 들어야 했다. 동서고금의 국가 원수 가운데 유례를 찾기 힘든 너절함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했었다. 과거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며 호기를 부릴 때는, 정치 이념과 철학은 다르지만 나름 단단한 내공을 가진 듯 보였지만 다 거짓이었다.
고시 출신 엘리트 관료들도 구차한 거짓말…"K 민주주의 최대 위험요인"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곽종근 전 육군특수전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윤석열 대통령,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 조지호 경찰청장,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윤창원·황진환 기자·대통령실 제공더 큰 문제는 이런 지질함이 윤석열 개인 뿐 아니라 12·3 '계엄의 밤' 이후 다수 고위 관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됐다는 점이다.
윤 전 대통령은 최고 학부와 검사 출신 초엘리트 경력을 배경으로 '고시 권력' 중심 기득권 위계질서를 굳히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등으로부터 "학습능력이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으며 신성 불가침의 신화가 조작되기도 했다. 물론 허위와 기만이었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언론 칼럼에서 "윤석열은 한국 사회에서 예외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편적 현상에 가깝다"며 "미성숙한 지배 엘리트들의 존재가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이라고 짚었다.
그 모래성 같은 위계 사다리의 하층엔 한덕수, 최상목, 이상민, 조태용 같은 또 다른 고시 출신 관료들이 포진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동을 결사적으로 막거나, 그 결과에 순순히 책임을 지거나, 최소한의 양심고백도 하지 않았다.
국무총리와 경제부총리를 거듭 하고 심지어 대통령권한대행도 두 차례나 한 '처세의 달인' 한 전 총리는 12·3 관련 재판에서도 모르쇠와 거짓말로 일관하다 CCTV 물증에 딱 걸렸다. 그러고도 한 말은 "사후적으로 보면 제가 영상에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는 궤변이었다.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역시 12·3 당일 '계엄 지시 문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고 잡아떼다 CCTV 증거에 잡혔고, 휴대전화 교체 여부도 부인하다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다"고 말을 바꿨다. 경호처 제공 비화폰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니까 제가 가지고 있더라"는 또 다른 유체이탈식 어록을 남겼다.
보수논객 정규재 씨는 최근 SNS에 윤 전 대통령 재판을 지켜본 뒤 "그대 윤석열이여! 아둔한 사람아!"라고 개탄하며 "윤석열은 대통령이었던 적이 없다"고 적었다. 이는 "너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일하는 기분을 내고 있지"라는 최근 인기 TV 드라마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대기업 출신 50대 김 부장의 애환을 다룬 이 드라마 속 직장 상사는 "일이란 곧 책임이야. 너는 아무 것도 책임지고 있지 않아. 아니, 책임지는 방법도 몰라"라고 타박한다. 김 부장에겐 다소 부당한 얘기지만 12·3 현장의 한국 엘리트 관료들에겐 제격인 비판으로 들린다.
비상계엄 1년을 맞아 사건 원인 규명과 단죄, 원인 분석, 대책 마련까지 어느 정도 이뤄질 법도 한데 아직 갈 길이 멀다. 다만 분명한 것은 12·3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다는 점이다. 능력주의에 경도된 괴물 엘리트가 득세하는 한 역사퇴행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형혁규 국회 입법조사처 선임연구관은 "제도가 아무리 완벽해도 선진 민주주의 미국의 현 사례에서 보듯 사람에 의해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며 "그러나 비상계엄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사람이지만 그것을 막은 것도 사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