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14일 성남시 분당구 성남도시개발공사에서 열린 '대장동 개발비리 항소 포기 규탄 현장간담회'에서 공사 관계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정치는 '보고, 듣고, 말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즉, 국민의 삶을 살피고 민심을 청취한 뒤 설득과 조정의 과정을 통해 국민의 삶이 나아지도록 하는 일이다. 유능한 정치가는 3가지 기능이 골고루 발달한 반면, 입만 살아있으면 대개 정치꾼이 되거나 독재의 성향을 갖기 십상이다.
최근 여기자를 향해 "돼지야!"라고 막말을 퍼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거친 입의 대명사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현지시간)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서 블룸버그 통신의 한 여기자가 '엡스타인 문건에 불리한 내용이 없다면 왜 공개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기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용히 해 조용히, 돼지야(Quiet, quiet piggy!)"라고 말했다.
기자를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적인 발언은 18일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나왔다. ABC뉴스 기자가 빈 살만 왕세자를 향해 자말 카슈끄지 암살 관련 질문을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대신 나서서 "ABC뉴스는 가짜뉴스다. 업계 최악 중 하나"라고 말했고, 해당 기자가 재차 엡스타인 문제도 질문하자 "해당 스캔들은 사기극이다", "당신의 형편없는 회사는 그 가해자 중 하나"라고 공격했다.
엡스타인 스캔들은 광범위한 미성년자 성접대 문제와 관련, 권력과 부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 미국 사회 전반에 충격을 던진 사건으로 엡스타인과 트럼프와의 관계가 집중 조명을 받아왔다. 카슈끄지 암살사건은 2018년 이스탄불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사우디 출신 반정부 언론인 카슈끄지가 의문사한 사건으로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 배후설이 제기돼왔다.
모두 권력을 둘러싼 의혹이 핵심이며, 언론이 주요 이슈들에 대해 질문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언론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트럼프의 행태에 미국 내에서는 "길거리 깡패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나왔다.
지난 2023년 11월 1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주부, 회사원, 소상공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경청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정부의 2년 7개월도 민심 청취 기능이 고장났다. 국민과의 연결고리인 언론에 귀 막은 채 편가르고 통제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바이든-날리면 사태로 시작된 언론과의 전쟁은 MBC 취재진을 대통령 전용기 탑승에서 제외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연례행사였던 대통령 신년회견은 KBS 녹화대담으로 대체됐다. 의도에 호응하듯 김건희씨가 수수한 명품백은 '조그마한 파우치'라는 굳이 낯설고 어려운 말로 둔갑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에는 가짜뉴스라는 낙인을 찍어 억압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의 위해성이나 김건희씨 일가의 특혜 의혹 보도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와 정의, 상식을 대변하거나 실정을 비판하면 반국가세력 취급을 했다. 반면 슈퍼챗 돈벌이에 몰두하는 극우 유튜버들, 부정선거음모론에 심취한 극단세력과 동행했다. 급기야 12.3비상계엄 당시에는 언론사 단전단수까지 시도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윤창원 기자문제는 윤석열 정권을 탄생시킨 국민의힘이 거의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다. 장동혁 체제의 여러 논란에도 최근 불거진 장애인 비하 파문은 차별의 문제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공당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심각하다.
박민영 미디어대변인은 최근 보수 유튜브 채널에서 "(비례대표에) 장애인을 너무 많이 할당해서 문제다", "김예지 같은 사람은 눈 불편한 것 빼고는 기득권"이라며 입에 담기 힘든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인종이나 여성, 장애인을 차별하는 발언은 서구 선진국이라면 정치생명이 영원히 끝날 뿐더러 형사처벌까지 각오해야 할 중대사안이다. 박 대변인의 반사회적 발언에 민심은 들끓었다.
박민영 대변인 페이스북 캡처하지만 장동혁 대표는 엄중경고하는 선에서 무마했다. 송언석 원내대표도 '자그마한 일'로 치부하며 언론에 화살을 돌렸다.
당 윤리규칙에는 '성별·나이·인종·지역·사회적 약자 등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언행을 해서는 안된다'고 명시돼 있다. 윤리위 규정에는 이로 인해 '당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그 행위의 결과로 민심을 이탈케 하였을 때' 징계하도록 돼 있다.
발달장애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 당원권 6개월 정지처분을 받았던 부산 북구청장이 그런 케이스다. 이번엔 박민영 사태로 당의 명예가 심각하게 실추됐음에도 규율은 작동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눈 감고 귀 막는 행태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실정과 김건희씨의 국정농단에 대해 동조하거나 알고도 모른 척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비상계엄 해제요구결의안 처리는 모른 척했고 탄핵소추안표결 과정에서는 당론으로 막아섰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이 안내견 태백이와 이동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그러나 시각 장애가 있는 김예지 의원은 달랐다. 탄핵소추안 표결에 당당히 참여해서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김 의원은 "대통령은 국회의원이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다. 위헌.위법한 비상계엄에 대해 단죄를 하는 게 마땅하다고 봤다"고 강조했다.
12.3 비상계엄이 내포한 위헌성·불법성을 국민의힘 구성원 중 누구보다 똑바로 바라본 인물이 김예지 의원이었다. 비록 눈은 불편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꿰뚫고 행동에 옮긴 인물이다.
오히려 12.3 비상계엄 1년이 지나도록 갈 길 몰라 헤매는 국민의힘이 위태롭기만 하다. 내란 수괴 윤석열 전 대통령을 면회하고, '우리가 황교안'이라고 외치고, 장애 비하 발언을 자그마한 일로 폄하한 당지도부가 민심과 담쌓은 채 눈 감고 귀 막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