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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중과세 금지'와 '도둑 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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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금지령에 맞서 지켜낸 '설'
불확실성의 시대에 되새기는 '설'의 의미

일제강점기 널을 뛰는 여성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일제강점기 널을 뛰는 여성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10년 8월 29일 한민족은 나라를 빼앗겼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온 강산이 땅을 치고 울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10월 1일 조선총독부는 관공서 휴무일을 일본의 연말연시 휴가(12월 29일~1월 3일)에 맞추도록 행정 체계를 개편했다. 조선의 '설'에 공식적으로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1937년)을 일으킨 1930년대가 되자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민족 말살 통치를 자행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 내지와 조선은 한 몸)를 내세우며 한민족의 상징인 '설'을 확실하게 뿌리 뽑으려고 했다. 한반도에서 조선의 시간(음력)을 지우고 일본의 시간(양력)만을 남기고자 한 것이다.
 
1936년 1월 경무국은 경찰을 동원해 '설'을 쇠는 행위를 대대적으로 단속했다. 설을 전후해 전국 방앗간에 가동 중단령을 내려 떡국을 원천봉쇄했다. 각급 학교에 설 당일 휴교를 금지하고, 떡국 등 설 음식을 싸 오지 못하도록 도시락을 검사하라고 지시했다.
 
1939년 1월 12일에는 '이중과세 전폐(二重過歲 全閉)'에 관한 실행 지침을 하달했다. 신정(新正, 1월 1일)과 구정(舊正,설) 두 번 쇠는 것을 완전 폐지하라는 것이다. 경찰은 설에 세배 가는 사람을 연행하고 흰 옷이나 색동옷 등 설빔을 입은 경우 먹물을 옷에 뿌렸다. 설 당일 시장을 폐쇄하고, 기차표 예매를 제한해 귀성 등 지역간 이동을 차단했다. 일제는 1940년대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패망으로 치닫자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가속화하며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조선 이름까지 삭제했다.
 
조선인은 저항했다. 힘이 없어 나라를 잃었지만 민족의 자존심과 정신은 내어줄 수 없었다. '설'을 지키는 것은 조선 민초들의 조용한 독립운동이었다. '설'은 일본의 신민이 아님을 증거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조선인들은 설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의 시간이 있다'라고 소리 없이 외친 것이다.
 
조선인은 방앗간의 문을 닫게 하자 밤중에 방 안에서 절구질을 해 떡을 만들었다. 절구 아래 이불을 겹겹이 깔아 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몰래 만든 떡으로 설날 꼭두새벽에 몰래 떡국을 끓여 먹어서 '도둑 떡국'이라고 했다.
 
서울 강남구 못골한옥어린이도서관에서 어린이들이 윷놀이를 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서울 강남구 못골한옥어린이도서관에서 어린이들이 윷놀이를 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설'은 해방 이후에도 신정과 구정으로 '이중과세'됐다. 그러다 1989년 노태우 정부에 와서야 설 연휴가 공식 공휴일로 지정되고 1999년 신정 휴일이 하루로 축소되면서 '설'은 89년 만에 온전한 제자리를 찾았다.
 
일제 강점기인 1924년 윤극영 선생은 <설날>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에는 '댕기', '색동 저고리', '절 받기' 등 우리의 설을 상징하는 아름답고 정겨운 말들이 담겨 있다. 나라를 잃은 그 분노와 슬픔,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우리 한민족은 목숨 걸고 설을 지키며 조국을 되찾고 부활할 것이란 꿈과 희망을 함께 공유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위기와 불안, 분열의 시간을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인들. 일제 강점기 선조들에게 '설'이 가졌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설 연휴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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