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계단에서 열린 대장동 일당 7400억 국고 환수 촉구 및 검찰 항소 포기 외압 규탄대회에서 규탄사를 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우리가 조국이다"와 "우리가 황교안이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전자는 2019년 이른바 '조국 사태' 때 친여(親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이 서초동에서 외친 구호다. 비교적 최신인 후자는?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12일 '대장동사건 항소 포기' 관련 규탄 집회에서 한 발언이다.
언뜻 대척점인 듯한 이 표현들은 각 진영의 강성 지지층에 소구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두 장면을 모두 현장에서 지켜본 기자는 장 대표의 '급(急) 고백'을 보며 한 국민의힘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검찰의 조국 전 법무장관 수사가 과했다는 여권의 지적을 "일부 이해한다"면서도, '전형적인 개딸의 시각'이라고 폄하했다. 반면, 지난달 장 대표의 윤석열 전 대통령 접견을 두고는 "숙제를 마친 것"이라며 크게 의미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우클릭'으로 보이는 행보가 있었다 해도, 다 계산된 스텝이란 취지다.
또 다른 당 관계자도 장 대표의 '진짜 관심사'는 오로지 내년 지방선거라며, 광주행(行) 등 지역행보를 "유심히 지켜봐달라"고 했다. 지선 결과가 사실상 재신임 여부를 판가름할 시험대인 만큼, 지도부가 중도 민심이 반영된 여론동향을 기민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는
야당이 '항소 포기'를 지렛대로 정국 주도권을 탈환할 수 있을지 주목하게 된 이유였다. '반윤(反윤석열)'을 자처한 안미현 검사도 "바람이 불어선지, 불기 전인지 모르지만 누워선 안 될 상황에서 누우신 것"(12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이라며 검찰 수뇌부를 질타한 사안 아닌가. 야권에는 분명한 호재였다.
그래서 사태 닷새 만에 국민의힘이 주최한 '대장동일당 7400억원 국고 환수 촉구 및 검찰 항소포기 외압 규탄대회'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 정치적 공세를 통한 '집토끼' 결집 외엔 순기능을 찾기 어려웠다. 무당(無黨)층에게 어필할 포인트는 거의 전무해 보였다는 얘기다.
상식적으로 짚어보자. 검찰이 추정한 민간업자들의 부당이득액 규모를 보면 1심 재판부가 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대신 업무상 배임을 적용했는지 궁금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 '무죄'는 다시 법리를 다퉈야 했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중앙지검에선 만장일치였던 '항소 의견'이 왜 뒤집혔는지, 전말을 밝히자는 지적도 온당해 보인다.
만약 윤석열 정부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민주당이 과연 보고만 있었을까.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6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참배를 시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번 집회를 각인시킨 '킬포'(킬링 포인트)는 진실 규명·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수사들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장 대표는 이재명 대통령을 가리켜
"존재 자체로 대한민국의 재앙"이라고 했다. 과거 일간베스트(일베) 등 극우 커뮤니티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하하며 쓴 표현과 겹쳐진다.
장 대표는 또 "이 대통령은 독재자"라며 "악(惡)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사유 없는 맹종이 독일의 나치를 낳았다는 취지로 주창한 개념인 '악의 평범성'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장 대표는 이튿날(13일) 이 대통령을 학살자 히틀러에 빗댔다. 이렇게 지르면 나중엔 어떤 강공이 가능할까, 싶은 수위다.
물론 백미(白眉)는 "우리가 황교안입니다"였다. 독한 데 더해 뜬금없다. 항소 포기를 덮으려 특검이 황 전 총리를 긴급체포했다는 장 대표 주장엔 근거가 없다. 황 전 총리가 12·3 비상계엄 당일 "종북주사파 세력과 부정선거 세력을 이번에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며 계엄령을 대놓고 옹호한 인사란 점을 감안하면 실소를 넘어 아연해진다. 황 전 총리가 특검의 출석 요구에 거듭 불응해 벌어진 일이란 점을 장 대표가 정말 몰랐을까.
무엇보다 황 전 총리는 윤 전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부정선거론자다. '6·3대선 불복'을 선언한 극우세력을 대변한다 봐도 무방하다. 이런 인물과 당을 동일시하는 말이, 매월 광주를 찾겠다는 '월간 호남'과 양립할 수 있을까. 이러고도 장 대표의 5·18묘지 참배를 막았던 광주 시민을 '일부 개딸'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여러분, 전쟁입니다"라는 새삼스러운 선전포고. 그리고
"이재명을 탄핵하는 날까지 싸우자"는 독려는 또 어떤가.
국민의힘 의석수(107석)로는 탄핵소추안 발의(국회 재적의원 과반수)도 언감생심이다. 여야가 함께 띄운 '대장동 국정조사'조차 독자적으론 추진이 불가능하다. 탄핵을 주문처럼 외기 전 먼저 할 일은 대안세력으로서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것 아닐까.
사족(蛇足)으로 현재 국민의힘의 투쟁은 내부에 썩 효능감을 주는 방식도 아닌 것 같다. 국정조사에 찬성하는 당 관계자는 "항소 포기야말로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체계적으로 싸워야 할 일"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장 대표의 '황교안 발언' 이후 당원게시판에는 "대장동 이슈로 좋은 기회가 왔는데 웬 뚱딴지 같은 헛소리인가" 등의 항의가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