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 서울중앙지검장. 박종민 기자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을 맡았던 검찰 수사팀이 윗선의 '항소 금지' 지시를 받아 항소 시한 직전, 실형을 선고받은 민간업자들에 대한 항소를 포기했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던 사건의 1심 단계에서 검찰이 곧바로 항소를 포기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수사팀은 이미 항소 방침을 확정해 대검찰청 보고까지 마친 상태였다고 공개적으로 밝힌데다, 항소 절차를 실제 결재했던 서울중앙지검장까지 돌연 사표를 내며 후폭풍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수사팀 반발하고 지검장은 사퇴…지휘부는 침묵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은 전날 "정진우 지검장이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 항소를 포기한 지 하루 만이다. 이번 결정과 관련해 내부 파장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자 정 지검장이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사의를 밝힌 것으로 보인다.
대장동 사건을 수사했던 강백신 대구고검 검사는 같은날 오전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 글을 올려 윗선의 부당한 지시로 항소하지 못했다며 반발했다. 서울중앙지검장으로부터 항소제기 결재까지 받았지만 대검 반부패부장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접수는 미뤄졌다는 게 강 검사의 설명이다.
강 검사는 지난 3일 대장동 사건 수사·공판팀이 항소를 제기하기로 의견을 취합했고, 항소장과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이어 공판 담당 검사들은 항소 마감 시한이 임박하자 4차장 검사를 찾아 항소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대검으로부터는 '배임죄는 유죄가 선고됐고, 유동규 전 본부장은 구형보다 중형이 선고돼 항소의 실익이 없다'는 취지의 통보만 받았다고 전했다.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배경에는 최종적으로 법무부 장·차관의 반대가 작용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강 검사는 '대검 내부적으로는 항소할 사안으로 판단했으나 법무부 장·차관이 반대했고 중앙지검 수뇌부가 대검을 설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덧붙였다.
대장동 수사·공판팀 역시 공식 입장문을 통해 "모든 내부 결재 절차가 마무리된 이후인 전날 오후 무렵 갑자기 대검과 중앙지검 지휘부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사·공판팀에 항소장 제출을 보류하도록 지시했다"고 비판했다.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의 이례적인 항소 포기 결정과 그 과정에서 확인된 내부 갈등이 서울중앙지검장 사퇴라는 결과까지 맞물리면서 논란은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검찰과 법무부 지휘라인은 별다른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이 3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며 입장을 밝히고 있다. 황진환 기자李 사건과도 연관…정치적 논란 불가피
검찰의 항소 포기에 대해 일각에서는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배임죄 폐지' 논의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기업의 경영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이유로 배임죄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대장동 비리 1심 재판부도 선고 당시 배임죄 폐지와 관련해 "완전 폐지 시 부작용이 예상돼 처벌 가능한 영역을 유형화하는 대체입법이 예상되고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라며 "배임죄가 실존하는 한 법원은 실정법 따라 형을 선고하고 구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검찰의 무분별한 항소 관행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 이후 항소 자제 기조가 반영됐다는 지적도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9월 국무회의에서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검사들이 (죄가) 되지도 않는 것을 기소하거나, 무죄가 나와도 책임을 면하려고 항소·상고해서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해당 결정은 현재 심리가 중단된 이 대통령의 대장동 관련 재판과도 연관돼 있어 정치적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 사건과 관련해 민간업자들과 같은 혐의로 기소돼 있지만 대통령 취임 후 불소추특권을 규정한 헌법 84조에 따라 재판은 중지됐다. 현재 함께 기소된 정진상 전 민주당 정무조정실장에 대한 재판만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