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 싣는 순서 |
① 인구감소 벼랑 끝 '선택과 집중'이 불러온 日 도야마의 변화 ② 철강에서 문화도시로…9월이면 '린츠'가 들썩인다 ③ '창조적 과소' 가마야마의 역설이 말하는 소도시의 생존법 ④ 청년이 돌아온다… 라이프치히 30년의 '반전' ⑤ 변방 산골서 스마트워크로 변모…핵심은 '숫자' 아닌 '순환' ⑥ 기업이 오고, 청년이 머문다…유럽의 '실리콘 작소니' 드레스덴 ⑦ 살아남는 도시의 조건…日 소도시 지역 정체성에 사활 걸다 ⑧ 당신의 도시에는 '시스템'이 있습니까? (계속) |
세계 최대 창업 허브 '스테이션F'. 전남CBS산업 쇠퇴와 인구 감소로 위기를 겪던 유럽의 중소도시들은 단기 개발보다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선택했다.
오스트리아 린츠, 독일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의 사례는 이를 보여준다.
세 도시는 위기를 단숨에 해결하려 하지 않고, 도시마다의 철학과 장기적 관점을 담은 시스템을 세웠다.
린츠는 철강 도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시민이 기술과 예술을 배우는 교육 체계를 30년 넘게 이어왔다. 그 결과 유럽의 '미디어 아트 수도'로 불리고 있다.
라이프치히는 최근 30년간 약 1조6천억 원을 투입해 극장·문화공간·유치원 등 사회 인프라를 조성하고, 빈집 프로젝트를 통해 도심을 회복시켰다. 이로 인해 인구가 다시 늘고, 공공 인프라를 중심으로 한 도시재생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드레스덴은 대학–기업–연구소–행정이 협력하는 유기적 연계 시스템으로 기업과 청년이 정착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도시 경쟁력을 공장의 굴뚝이 아니라, 사람이 배우고 일하며 정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도시 운영 시스템에 두었다는 점이다. 성장의 중심을 산업이 아닌 시스템에 둔 결과, 도시는 단기 회복이 아닌 장기 지속의 힘을 얻으며 지역 소멸에 맞서고 있다.
양지애 코리아스타트업센터(KSC) 파리 소장이 스테이션 F의 운영 구조를 소개하고 있다. 전남CBS파리 스테이션 F, 천 개의 스타트업이 모인 이유
이 지속 가능성의 흐름은 파리에서도 이어졌다.
파리 13구의 스테이션 F는 1920년대 철도 화물역을 개조해 만든 창업 캠퍼스다. 철근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어진 초기 건축물로, 높은 천장과 자연 채광 구조 덕분에 현재는 프랑스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2012년 프랑스 기업가 자비에 니엘(Xavier Niel)이 이 건물을 인수해 2억5천만 유로를 들여 리모델링했고, 2017년 '천 개의 스타트업이 모이는 캠퍼스'를 목표로 문을 열었다.
현재는 구글, 아마존, 루이비통, 메타, 틱톡 등 40여 개 글로벌 파트너가 각자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전 세계에서 온 1,000여 개 스타트업 팀이 입주해 있다. 글로벌 대기업과 창업가가 한 공간에서 상시 협력하는, 세계 유일의 창업 생태계다.
스테이션 F의 직원은 40명 남짓이다. 대신 대학·대기업·협회가 참여하는 파트너십 기반 구조로 운영된다.
각 파트너 기관은 AI, 패션, 콘텐츠, 핀테크 등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서 스타트업을 선발해 멘토링, 투자 연계, 기술 컨설팅을 직접 진행한다.
예를 들어 구글은 데이터 분석과 AI 교육을, 루이비통은 패션·유통 관련 협업 기회를 제공한다. 스테이션 F는 공간과 네트워크를 제공하고, 파트너들이 실질적으로 창업 생태계를 이끄는 구조다.
창업자들이 꼽는 최대 강점은 '다른 창업자'들이다.
한 설문조사에서 입주 스타트업의 80%가 "가장 큰 자산은 다른 창업자들과의 연결"이라고 답했다. '코파운드(Cofound)' 프로그램을 통해 공동창업자를 찾거나 협업을 추진한다.
스테이션 F의 핵심 경쟁력은 글로벌 파트너가 직접 운영하는 육성 체계다. 스테이션 F는 단순히 공간만 제공하고, 구글·마이크로소프트·루이비통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각자 필요한 분야의 스타트업을 직접 선발해 육성한다.
예를 들어 구글은 AI·데이터 분석 교육을, 루이비통은 패션·유통 분야 멘토링을 진행하는 식이다.
스테이션 F는 이 파트너들의 프로그램이 원활히 작동하도록 조율하며, 전체 생태계를 관리하는 '플랫폼' 역할을 맡는다.이 체계에서 머신러닝 협업 플랫폼 허깅페이스(Hugging Face), 온라인 보험 플랫폼 알란(Alan) 등 유니콘 기업이 탄생했다.
현재 이곳에는 한국 스타트업 21개 팀도 함께 있다. 문화콘텐츠, 디지털테크, 스마트시티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다.
이 가운데 '이플로우(Eflow)'는 최근프랑스 지역 혁신 사업에 선정돼약 300만 유로(48억 원) 규모의 해외 투자를 받았다. 현지 기업과 함께 스마트시티 실증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스테이션F에 입주해 한국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코리아스타트업센터(KSC)파리의 양지애 소장은 "글로벌 파트너들을 성공적으로 연결한 것이스테이션 F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이라며 "각 대기업이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그 성과를 직접 관리하도록 한 점이 생태계의 지속성을 만든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의 창업 지원은 여전히 보조금 중심의 단기 사업 구조가 많다. 지원 규모는 크지만, 사업이 끝나면 관계가 끊기고 네트워크가 유지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테이션 F는 이런 방식 대신, 기업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실행 중심의 운영 체계를 갖췄다. 정기 미팅과 전문가 매칭을 통해 투자·기술·법률·마케팅 등 문제를 상시 점검하며, 이런 지속적 관리와 연결 구조가 스타트업의 지속 성장 기반을 만든다.
스테이션F 내부. 전남CBSKSC 파리, 한국 스타트업의 현지 안착 플랫폼
2024년에는 한국의 코리아스타트업센터(KSC) 파리가 정부기관 최초로 스테이션 F의 파트너로 입주했다.
KSC는 한국 스타트업의 유럽 진출을 돕는 플랫폼으로, 비자 발급 추천서, 법률·세무 자문, 투자자 연계, 멘토링까지 현지 안착에 필요한 전 과정을 지원한다.
양지애 소장은 "KSC 파리는 단순한 사무공간이 아니라, 한국 스타트업이 프랑스 시장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현지 안착 플랫폼"이라며 "이제는 얼마나 많은 기업을 유치했느냐보다 얼마나 오래 머물며 성장하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KSC는 프랑스 명문 경영대학원 HEC 파리와 협력해 스타트업에 교육과 투자 연계를 지원하고, 현지 대기업·정부기관·협회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창업 지원을 구조화하고 있다.
이곳에서 지원받은 한국 스타트업들은 현지 시장 적응 속도가 빠르고, 정책과 민간 네트워크가 결합된 모델로 '프랑스형 창업 생태계'의 실질적 효과를 경험하고 있다.
파리 마레지구 거리. 전남CBS'빠른 성장' 보다 '오래 버티는 구조'로
스테이션 F 입주 기업인 K패션 플랫폼 기업 '슬로크'는 지난 9월, 프랑스 파리 마레 지구에 자사 글로벌 O2O(Online to Offline) 브랜드 '다나야드(DANAYARD)'의 상설 매장을 열었다.
라호진 슬로크 대표는 "예비창업패키지, 중진공 대출, 청년창업사관학교 등 정부 지원을 통해 프랑스 시장을 꾸준히 분석하고, 엑스포와 팝업스토어를 반복하며 시장 반응을 검증해왔다"고 설명했다.
슬로크의 본사는 대구에 있다. 라 대표는 "대구에는 여전히 섬유 산업 기반이 탄탄하게 남아 있고, 지역 대학과 인력도 충분하다"며 "지방도 경쟁력이 있으며, 핵심 거점 도시들이 인력과 산업을 연결한다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매달 KSC 파리와 현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로드맵 미팅을 통해 법적 규제, 세무, 마케팅 전략 등을 점검하며 문제를 해결했다. KSC는 HEC 파리와 협력해 각 분야 전문가를 스타트업에 연결하고, 현지 대기업과의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실질적 투자와 매출을 만들어내고 있다.
라라 대표는 "한국은 보조금 중심이라 속도는 빠르지만, 프랑스는 네트워킹과 전문가 컨설팅을 통한 지속 성장 구조가 강점"이라며 "한 번의 지원이 아니라 꾸준히 돌보는 시스템이 스타트업의 생존력을 높인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속도와 프랑스의 시스템이 결합된다면, 지방에서도 글로벌 스타트업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라호진 슬로크 대표가 다나야드 매장에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전남CBS 린츠는 예술과 기술을 배우는 교육 시스템으로 쇠퇴한 철강 산업의 틀을 바꿨다. 공장을 대신해 시민이 스스로 배우고 창작하는 구조를 세우며, '문화도시'로 성장했다.
라이프치히는 30년에 걸쳐 1조6천억 원을 투입해 극장과 유치원, 주거 인프라를 재건했다. 삶의 기반을 복원한 도시재생 시스템이 사람을 다시 불러모았다.
드레스덴은 대학·기업·연구소·행정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움직이며 교육–연구–일자리로 이어지는 '연계 시스템'을 구축했다. 청년이 머무는 도시, 산업이 순환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파리는 '창업이 오래 버티는 시스템'을 설계했다. 스테이션 F를 중심으로 글로벌 기업과 스타트업이 협력하며지속적인 네트워크와 멘토링으로 세계 최대의 창업 허브로 자리 잡았다.
이 네 도시는 공통적으로 '단기 성과'보다 '지속 가능한 구조'를 택했다. 교육, 인프라, 산업, 행정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도록 설계해 도시가 스스로 성장하고 유지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결국 도시의 지속 가능성은 한 번의 투자나 사업이 아니라,그 노력이 계속 이어지도록 설계된 시스템에서 나온다. 지원금보다 실행 구조가, 유치보다 정착 전략이 중요하다. 도시의 경쟁력은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작동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개발'보다 '운영', '확장'보다 '유지'가 중요한 시대다. 도시를 바꾸는 힘은 사업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당신의 도시에는 시스템이 있습니까?"
* 본 보도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 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