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포스터.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One Battle After Another"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곧 또 다른 전투가 시작된다. 지금 아시아 태평양의 지정학적·경제적 현실을 이보다 잘 요약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31일 공식 개막하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이하 존칭 생략)가 오늘(29일) 한국을 찾는다. 이어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도 내일 방한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새 영화에서 '끝나지 않는 싸움'을 그렸다. 과거의 혁명가가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딸을 지키기 위해 다시 투쟁에 나서는 내용이다. 지난 1월 20일 재집권한 트럼프에게도 끝나지 않는 싸움이 있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이다. 1기 때보다 더 강경해진 그의 전투는 이번엔 '미국 우선'을 넘어 '미국만'을 향한다. 문제는 이 싸움의 최전선이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이라는 점이다.
트럼프의 전투는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그는 적보다 동맹을 먼저 노린다. 집권 1기 때인 2017년 트럼프는 캐나다·멕시코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파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듬해에는 종국적으로 태평양 너머 중국을 겨냥한 철강·알루미늄 관세 폭탄을 터뜨렸다. 관세 압박에 내몰린 멕시코, 캐나다는 차례로 새 무역협정인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에 합의했다.
8년 만에 돌아온 트럼프의 첫번째 스파링 파트너 역시 캐나다와 멕시코였다. 취임 전부터 25%의 관세 부과를 예고하더니 재집권 하루 만에 실제 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유예와 보복, 맞불을 거친 미국과 캐나다·멕시코와의 관세 전쟁은 9개월째 진행 중이다. 트럼프는 27일 캐나다 온타리오주(州)의 관세 반대 광고를 이유로 협상마저 전격 중단했다. 멕시코와는 54개 관세 장벽을 두고 샅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연합뉴스한국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1기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끔찍한 거래(horrible deal)'라고 부르며 파기 위협을 가했다. 거세지는 재협상 압박과 철강 관세의 파고 앞에서 우리 정부의 선택지는 재협정 뿐이었다. 결국 한국은 2019년 9월 자동차 시장 개방 확대 등 미국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한 새 협정에 서명해야 했다. 사실상 우리 측의 일방적인 양보였지만 트럼프는 "양국에 상당한 이익이 될 것"이라고 포장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상호관세는 동맹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은 미국 입장에서 '최악의 침해국'으로 분류됐다. 국경을 맞댄 남북 이웃에 매긴 관세는 불법 이민과 중국발 '좀비마약' 펜타닐 차단에 대한 비협조라는 최소한의 명목이라도 있었다. 상호관세는 그저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거두고 있으니 앞으로 계속 수출을 하려면 세금을 내라는 식이다.
일본과 EU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 관세를 낮출 수 있었다. 우리는 다르다. 미국이 요구하는 대미 3500억달러 투자펀드는 한국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이다. 펀드의 운용 방식과 수익 배분까지 감안하면 굴종에 가깝다. 지난 8월 대통령 이재명과 트럼프가 첫 정상회담에서 관세 유예와 대미 투자에 합의하고도 후속 협의가 지지부진한 이유다.
오늘로 예정된 두번째 한미 정상회담은 분명 기회이자 계기가 될 수 있다. 대통령실 정책실장 김용범과 산업통상부 장관 김정관 등은 이달에만 일주일 새 2차례나 미국을 찾아 협상에 나섰다. 최근까지 미국 당국자와 화상회의도 이어갔다고 한다. 모두 양국 정상이 경주를 무대로 상호호혜에 입각한 협정문에 서명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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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은 밝지 않다. 이재명은 27일 공개된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겠지만, 그것이 한국에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할 정도여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모든 주요 세부 사항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고도 했다. 트럼프 방한에 맞춰 일방적 양보를 '조공'처럼 내놓을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국은 쉴 틈이 없다. 오늘 한미 회담에서 트럼프의 요구를 마주한 후, 곧바로 내일 미중 정상회담이라는 세기의 담판을 지켜봐야 한다. 내달 1일에는 시진핑과의 한중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대미 협상의 주춧돌 격인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 이른바 '마스가(MASGA)'는 벌써 중국의 견제구를 불러왔다. 두 거인 사이에 낀 한국은 끝을 알 수 없는 전투의 한복판에 서 있다.
'APEC, 경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연합뉴스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주인공이 싸운 이유는 명확했다. 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싸움도 다르지 않다. 8년 전 FTA 재협상이 끝이 아니었듯, 대미 투자액을 깎더라도 방위비 청구서가 뒤따를 것이다. 한 번의 양보는 다음 요구의 전제가 될 뿐이다. 트럼프를 만족시키는 싸움인가, 아니면 우리의 미래를 지키는 전투인가. 선택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