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트럼프는 원래 인기 리얼리티 TV 쇼 <어프렌티스>의 스타였다. 무대가 백악관으로 바뀌었을 뿐, 그는 여전히 '장면'을 만들고 '관심'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외교를 한다. 1기 때 김정은과의 회담은 그의 최애 에피소드였다. 적지 않은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시청률은 제법 괜찮았다. 게다가 세기의 명작으로 기록되며 연말 각종 시상식에서 레드카펫을 밟을 뻔한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조기 종영해야 했다. 하노이에서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맞은 김정은이 사실상 중도 하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판문점에서 깜짝 번개라는 서프라이즈를 선보였지만, 한 번 이탈한 궤도를 돌리진 못했다. 이후 코로나19와 대선 패배 등 악재가 겹치면서, 세기의 브로맨스는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된 트럼프는 시즌 2를 기대하며 열심히 빌드업 중이다. 그러나 섭외부터 난항이다. 트럼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러브콜을 보내지만, 김정은은 사실상 '읽씹' 중이다. 이제는 자신의 몸값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에 걸맞은 개런티가 없으면 출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곧 한국을 방문하는 트럼프는 다시 김정은을 향해 구애를 해본다. 김정은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나는 100%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은이 출연의 개런티로 내걸고 있는 '비핵화 포기'에 대해선 "그들이 일종의 핵보유국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애드리브처럼 들리지만 준비된 대사였을 것이다.
북한이 원하는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김정은이 "핵무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일단 만나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처럼, 지난 2019년처럼 깜짝 번개라도 해보자 거다. 뜨거웠던 세 번의 포옹, 따뜻했던 스물일곱 통의 러브레터…잊었니! 그러나 김정은은 그건 "좋은 추억"이었다고만 한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고도 했다. 김정은은 이미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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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밀당은 꼭 <환승연애>를 보는 것 같다. <환승연애>는 현재 OTT 플랫폼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이다. 이별한 네댓 커플이 한 공간에 모여 새로운 인연을 찾는 이야기로, 'X(옛 연인)'에 대한 각자의 다른 '온도차'가 주요한 재미 요소다.
어떤 출연자는 X와의 재회를 꿈꾸지만, 정작 그 X는 새로운 인연에게 더 끌린다. 과거의 오해를 풀고 X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며 재회하는 커플도 있지만, X를 뒤로한 채 새로운 인연과 다정하게 손을 잡고 떠나는 출연자도 있다. 쇼가 끝날 때까지 결말을 알 수 없다.
APEC을 계기로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난다면 약 6년만의 재회이다. 이들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결별의 시발점이었던 '하노이'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
하노이에서 북한은 영변 핵단지 폐기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미국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 유예 지속, 일부 제재 완화, 종전선언 정도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존 볼턴의 '노란 봉투'와 트럼프의 스캔들을 다룬 '마이클 코언 청문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상호 불신 때문이었다.
다시 만난다면 '하노이'가 아닌 '싱가포르'에서 출발하는 건 어떨까.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의 아침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서로를 '리틀 로켓맨'과 '늙다리 미치광이'라 조롱하던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고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트럼프: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는 좋은 토론을 할 것이고, 굉장한 성공을 예상합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둘 것으로 보입니다. 매우 영예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좋은 관계를 가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김정은: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이어 그들은 1)새로운 북미 관계와 2)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3)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4)한국전쟁 참전 미군 유해 송환을 약속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구체적인 비핵화 내용과 시간표가 빠졌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70년간 적대 관계였던 두 국가의 정상이 만나 양국 관계의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하노이에서는 결국 '믿을 수 없다'로 바뀌었지만, 앞서 싱가포르에선 적어도'한번 믿어보자'로 시작했던 것이다.
북핵 문제가 대두된 지난 30년간 미국과 북한은 수많은 합의를 맺었다. 제네바 기본합의, 9·19 공동성명, 2·13 합의 및 10·3 합의, 2·29 윤달 합의 등. 문제는 이런 합의의 결함이 아니라, 이행을 가능케 할 신뢰의 부재였다. 무너진 건 문서가 아니라 믿음의 끈이었다.
6년 만에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만난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길 기대해선 안 된다. 짧게는 6년, 길게는 70년간 쌓인 불신부터 마주해야 한다. 서로 적대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의 세월을 돌아보고, 그 위에 다시 믿음을 쌓아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불신받는 두 사람에게 신뢰를 논하라니, 아이러니한가? 그러나 세상의 모든 관계가 그렇듯… "바보야, 문제는 신뢰야."
박형주 칼럼니스트
- 전 VOA 기자, 『트럼프 청구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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