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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응답하라 1984, 나의 빽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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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번째 LP축제 서울레코드페어 10/25~26 개최

제14회 서울레코드페어 포스터. 라운드앤라운드 제공제14회 서울레코드페어 포스터. 라운드앤라운드 제공
아버지는 음악애호가였다. 중학생 때는 몰래 신문배달을 해서 라디오를 샀고, 대학생이 되자 도서관보다 음악감상실에서 더 많이 목격됐다. 그런 아버지는 대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도 세 차례나 이사를 하면서도 전축과 LP(Long Playing)판들을 버리지 않았다. 신혼 시절 집을 장만하자마자 구입했던 전축을 하늘나라 가실 때까지 애지중지했다.
 
전축, 즉 전기축음기는 턴테이블과 앰프, 스피커로 구성된 오디오 시스템을 말한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캐롤 음반을 턴테이블에 걸어 놓고 온 가족이 통닭을 먹던 성탄절 기억은 지금도 따스하다. 카세트 테이프만 듣던 나도 가끔씩 전축으로 고상하게 폼을 잡아보려 했는데 LP가 죄다 클래식이라 1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고딩이 됐고 락큰롤과 헤비메탈은 나의 장르가 됐다. 거기에는 기라성 같은 문제아들이 넘쳐났고 그들이 샤우팅한 노래들은 당연히 금지곡이었다. 영화와 음악 등에 대한 검열이 존재하던 무시무시한 시절, 전설의 악당들이 부른 노래들을 너무나 듣고 싶었지만 양지에서는 불가능했다. -당시에는 음반에 반드시 건전 가요를 수록해야 했는데, 이문세는 공전의 히트를 한 3집에서 '소녀', '난 아직 모르잖아요', '휘파람' 등 그의 노래 외에 '어허야 둥기둥기'라는 건전 가요까지 히트시켰다-
 
그러나 미칠 듯한 갈증에 시달리던 우리에게 오아시스는 있었다. 바로 청계천 세운상가였다.
 
세운상가는 과거 핵폭탄 말고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올드 테크의 상징이었다. 그 첨단 기술의 부산물이 이른바 '빽판'이었다. 빽판은 불법 복제 음반으로 해외 음반 수입이 거의 없던 1960년대에 등장해 1980년대까지 인기를 끌었다. 흰색 종이 커버에 들어있고, 뒤에서 유통된다고 해서 빽(白,Back)판이라고 불렸다. 주로 세운상가에서 대놓고(?) 판매됐는데, 비록 해적판이지만 당국의 검열을 피해 해외 대중음악에 대한 욕구를 총족시켜 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이렇게 세운상가는 7,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중심지로 작동했다.
 
1984년 고2 가을. 영국 밴드 퀸에 빠진 나는 중간고사를 마치고 세운상가를 찾았다. 3년 전 퀸 결성 10주년을 맞아 발매된 'Queen Greatest Hits'의 빽판을 사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도 정식 발매되기는 했지만 금지곡 'Bohemian Rhapsody', 'Killer Queen'이 빠진 불량품이었다. 빨간책을 파는 무서운 아저씨들의 호객 행위를 피해 퀸 빽판을 손에 넣고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옅은 푸른 빛으로 복사된 빽판의 프레디, 브라이언, 로저, 존 형들을 보고는 얼마나 황홀했던가.
 
그 아스라한 시간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다. 카세트 테이프, CD를 거쳐 음원 파일로 진화하며 음반이라는 단어는 구닥다리가 됐다. 그런데도 LP판의 생명은 꺼지지 않고 부활하고 있다. 우리 같은 아재 뿐 아니라 MZ세대까지 음반을 모은다. 아름다운 앨범 재킷 디자인이 아트로 여겨지며 소장 욕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대량 제작하지 않는 만큼 재테크 수단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2014년 발매된 아이유의 한정판 LP '꽃갈피'의 거래가는 200만원이 넘는다. 3만4천원에서 60배가 넘게 뛰었다. 그래서 '판테크'란 말이 나왔다.
 
싱글과 앨범 등 모든 음반을 통칭하는 바이닐(Vinyl) 레코드라는 용어도 익숙해졌다. 지난해 미국의 연간 바이닐 판매량은 4300만장으로 15년 만에 15배 이상 증가했다. 방탄소년단 등 K팝 가수들의 바이닐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연합뉴스연합뉴스
이런 열기를 바탕으로 2011년 서울레코드페어가 처음으로 막을 올렸다. 올해는 14회째로 오늘과 내일(25~26일) 서울 성동구 펍지 성수에서 열린다. 이 레코드 축제는 지난 2019년 2만명이 찾으며 무려 10배나 성장했다. 한국에서 사라졌던 LP 제작업체도 3곳이 생겼다.
 
중고 음반과 함께 40여 종의 '한정반/최초 공개반'을 판매하고 해당 아티스트들과 함께 하는 토크, 팬 사인회, 음악 감상회 등 이벤트도 마련됐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오전 시간대는 사전예약해야 하는데 이미 마감됐다.
 
41년이 지났고 다시 가을이다. 이번 주말에는 성수동을 찾아 LP판들을 뒤져 보고 싶다.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시리도록 그리운 그 시절.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 내 젊은 날의 세운상가 빽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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