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건 표결하는 유엔안보리. 연합뉴스다수결이 능사가 아님은 고대 신라인들도 알았다. 신라의 귀족 대표자 회의로 알려진 화백(和白)은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 방식을 고집했다. '신라전(新羅傳)'은 "정사는 반드시 중의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중앙집권국가로 더디 발전한 신라의 특징을 반영한다.
화백 대표자들도 의견이 분분할 때 다수의 뜻을 우선하면 결정이 빠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로써는 화합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을 터다.현대의 첨예한 외교 현장에서도 비슷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의 비상임이사국으로 이루어진 UN 안전보장이사회도 다수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안보리에서 안건이 통과되려면 상임이사국 5곳의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 한 곳이라도 거부권(veto)을 행사하면 그대로 부결이기 때문에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문안을 다듬고 수정하는 작업을 끝없이 이어가야 한다.
각각의 권한을 위임할 대표자를 뽑는 방식을 두고도 인류는 고심에 고심을 더해왔다. 우리에게는 '단순다수제'가 친숙해 보이지만, 선호하는 후보들의 순위를 표기한 뒤 이를 반영하여 대표자를 뽑는 '선호투표제'도 있고, 압도적 득표자가 없을 경우 상위 후보를 추려 다시 투표케 하는 '결선투표제'도 있다. 추기경들이 새 교황을 선출할 때 ⅔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비밀투표를 이어나가는 '콘클라베' 방식도 일종의 결선투표제다.
절대명제가 된 '다수 우위' 속 토론은 실종
총·칼을 들지 않은 상태라면 그나마 수적 우세를 잣대로 집단의 의사를 결정하면 될 일을, 이렇게 복잡하고 난해한 방식으로 풀어보려는 이유는 집단의 질서와 화합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다수의 결정으로 소수를 배제해가다 보면 결국 누구도 온전할 수 없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차 속에 어떻게든 지혜로운 조정을 이루려는 행위가 정치이고, 그 가운데 가장 합리적 형태로 떠오른 것이 민주주의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시끄럽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은 <왜 도덕인가>라는 책에서
"토론으로 인한 다툼과 갈등, 소동으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모습, 진정한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회 본회의. 윤창원 기자현재의 대한민국에도 '다툼과 갈등, 소동'은 있다. 하지만 그 파열음이 토론에서 기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여권은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국정의 한 축인 야당을 설득하려 하거나 적극적인 논의를 시도하지 않았다. 수십 년간 유지돼 온 형사사법 체계가 바뀌게 되었고, 이제 사법부 개혁에도 나섰지만 야당에는 '내란당'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마이크조차 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 제1야당은 목소리 높여 이를 성토할 법하지만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내부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그저 다수 확보에만 급급해 이단 종교까지 끌어들인 사실이 최근 특검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수의 지배가 부득이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데는 '유튜브'로 상징되는 극단적 정치 세력의 영향력이 한 몫을 했다. 과거 하향식 공천 등 사당화(私黨化) 문제로 지탄을 받은 정당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권력을 대중에 이양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다수 의견은 차츰 절대 명제가 되었고, 극단적 정치 유튜버들은 편향적 여론의 구심점이 되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여기에 편승한 제도권 정치 권력은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정치 본연의 역할을 내팽개친 뒤 이제는 단순한 '다수 바라기'로 전락해버린 모습이다.꼭두각시가 된 정치, 다수 횡포는 어떻게 견제하나
연합뉴스
문제는 여야가 각각 추종하는 다수 대중이 횡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19세기 미국에서 갖춰가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며 찬탄했지만, 민주주의가 만들 수 있는 부작용을 간파했다. 바로 '다수의 횡포'로, 이에 대해 토크빌은 책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만일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악용해서 반대 입장의 사람들을 못살게 굴 수 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면 다수도 같은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왜 없다고 하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어 "다수는 실질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권력은 행동뿐 아니라 의지에도 작용하고 모든 도전뿐 아니라 모든 토론까지도 억압한다"며 "합중국(미국)만큼 사상과 언론의 진정한 자유가 결여된 나라도 없다"고 꼬집었다.
위 지적이 따끔하게 느껴지는 건, 지금 대한민국에도 '개딸'과 '윤어게인'으로 일컬어지는 다수 집단이 토론까지 억압하며 정치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언제나 국민은 옳다'며 종국에는 더 큰 다수의 선택이 합리적 결과를 이끈다고 항변하고 싶을지 모르나, 쿠데타를 일으킨 윤석열조차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밖으로는 좌충우돌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국민의 선택을 받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학살자 히틀러도 당시 독일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한 다수는 권한을 행사할 뿐 책임을 지는 일은 없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가 낳은 또 다른 숙제들이 즐비한 가운데, 지금 당면한 과제 중 하나는 다수의 힘을 어떻게 견제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만장일치까지는 아니어도,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진심어린 설득이 필수라는 상식이 복원되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는 힘을 가진 다수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 뿐이다.
그렇게 정치가 형해화 할 때, 무대 뒤 익명의 다수는 댓글로, 문자폭탄으로 세상을 호령할 것이다. 파국적 결과에 대해서는 언제나 눈을 돌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