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을 통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 위원장과의 친분을 강조한데 대해 '자신도 그렇다'고 화답한 셈이다.
트럼프에 '아직도'라고 말하는 김정은
지난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파문이후 6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그 사이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김 위원장 자신은 '아직도'라며 트럼프 대통령에 호감을 표시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만약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데 기초하여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포기하고 핵 보유의 현실을 인정한 조건 하에서 '평화공존', 즉 북미의 관계개선을 희망한다면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얘기이다. 김 위원장의 이런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분을 강조하며 조건부 대화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 위원장의 긴 연설(A4용지 18페이지 분량)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대미·대한 입장' 의 내용을 보면 실제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과는 별개로 핵보유국의 위상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가 더 강하게 읽힌다.
김 위원장은 "우리가 왜 '비핵화'를 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한 뒤 "천만에! 천만의 말씀입니다. 단언하건대 우리에게서 '비핵화'라는 것은 절대로,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미국과 그의 동맹국들이 10년, 20년 아니 50년, 100년 '비핵화'를 열창, 합창해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보유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싫든 좋든 변함없이 남아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등 연설 도처에서 '비핵화 불가론'을 역설했다
비핵화 불가론, 카다피·후세인도 염두에 둔 듯
그가 리비아 카다피와 이라크 후세인의 사례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핵을 포기시키고 무장해제시킨 다음 미국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세상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김 위원장의 이런 발언은 북미대화를 하려면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국 위상을 인정하고 비핵화 협상을 배제하는 보다 분명한 입장과 행동을 먼저 보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올해 안에 자신을 보고 싶다'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실상 공을 넘긴 셈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다음 달 경주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만큼 이 때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와 함께 대북 메시지의 내용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북미정상회담에 강한 의지를 피력해온 만큼 비핵화 목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의 핵 동결 등의 조치로 일부 제재해제와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이뤄지면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사실상 인정하는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김 위원장은 미국과의 대화에 일부 여지를 남긴 것과 반대로 이재명정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한국과 마주앉을 일이 없으며 그 무엇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이고 "일체 상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선언이다.
이승만·제헌헌법까지 끌어들여 '적대 2국' 강조
그는 특히 '적대적 2국가론'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의 제헌헌법까지 끌어들였다.
"리승만은 1948년 7월에 조작 공포한 첫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조선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문구를 쪼아박음으로써 우리 국가에 가장 적대적인 태생적 본성을 성문화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이 장황하게 '통일 불가론'을 역설한 것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그는 "대한민국은 모든 분야가 미국화된 반신불수의 기형체, 식민지 속국이며 철저히 이질화된 타국"이라며 "물과 불이 융합될 수 없"는 것처럼 "결단코 통일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명백히 우리와 한국이 국경을 사이에 둔 이질적이며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임을 국법으로 고착화시킬 것"이라고 밝혀 '적대적 2국가'를 헌법에 추가 반영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연합뉴스김 위원장이 지난 2023년 말에 처음 제기한 적대적 2국가론을 이번 연설을 통해 쐐기를 박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적대적 2국가론'과 '통일 불가론'을 강조한 것은 대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설득의 맥락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부 메시지 강해, 네팔 동티모르 의식 ?"
김 위원장이 이미 지난 2024년 1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을 통해 영토조항 신설 등 적대적 2국가의 헌법 반영을 지시했음에도 아직까지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는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조국통일론'에서 김정은 시대 '통일불가론'으로의 급격한 전환에 대한 내부 설득이 쉽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이 "법 기관들에서는 최근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데 맞게 우리 제도를 침식시키고 우리 공민들을 변질시키려는 적들의 준동과 사회정치적 안정을 파괴하는 온갖 범죄 행위들과의 투쟁을 더욱 책략적으로, 공세적으로, 전면적으로 엄격히 벌려야 하겠다"고 강조한 것도 사상통제와 체제단결을 꾀한 대목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김 위원장의 연설에는 대외 메시지도 있지만 대내 메시지가 강하다"며 "최근 네팔과 동티모르 등의 소요사태를 의식해 내부 설득과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임을출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연설은 적대적 2국가 기조의 종합판이자 결정판"으로 "주민들에게 통일 불가와 비핵화 불가 입장을 재확인하고 헌법화를 강조해 주민들의 충성을 유도하고 사상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내포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