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우편함. 노컷브이 캡처한국토지주택공사(이하 LH) 아파트 단지에 설치된 이른바 '스마트우편함' 중 일부의 보안기능에 치명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CBS 취재결과 확인됐다. 특히 LH가 이런 결함을 은폐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정황까지 포착돼 업체 선정과정을 둘러싼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다.
누구나 열어볼 수 있는 '황당한' 스마트 우편함
지난 2023년부터 입주가 시작된 위례의 LH행복주택 A아파트에는 현재 스마트우편함이 설치돼 있다. 스마트우편함은 IT 보안기술이 접목된 우편함을 설치해 우편물 분실 예방과 개인정보 보호 기능을 강화하고, 등기우편 배달을 자동화해 집배원들의 업무강도를 낮추기 위한 목적으로 지난 2017년 말부터 우정사업본부가 추진한 사업이다. 공기업인 LH가 사업주체가 되어 건설한 주택단지에는 스마트우편함이 의무적으로 도입돼 있다.
하지만 CBS 취재결과 현재 LH 아파트 단지에 설치된 스마트우편함 상당수가 보안에 구조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집배원이 아닌 어느 누구나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만 입력하면 자유롭게 우편함 문을 여닫을 수 있어 보안기능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던 것이다.
위례의 A아파트가 대표적이다. 본사 취재기자가 직접 아파트 단지 우편함에서 집배원 모드를 실행해 봤다. 중앙 단말기에 집배원 모드를 누르자 화면에 전화번호를 입력하라는 지시가 떴고 취재기자의 개인 휴대번호를 누르자 곧바로 휴대전화에 인증번호가 전송됐다. 인증번호를 단말기에 입력한 뒤 집배원들만 사용할 수 있는 모드가 열렸다. 특정 세대의 우편함을 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 세대의 우편함을 아무 제한 없이 열 수 있었다. 우편함 개방 기능 사용자가 정식 집배원이 맞는지 확인하는 어떤 절차도 없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이 아파트 입주민들의 우편함을 마음대로 열어볼 수 있는 '이상한' 스마트 우편함인 셈이다.
스마트우편함의 생명은 보안기능이다. 구식 개방형 우편함과 달리 완전 폐쇄된 스마트우편함은 중앙 단말기를 통해 집주인과 집배원만이 암호 입력을 통해 해당 호수의 개폐가 가능해야 한다. 이런 강력한 보안기능 때문에 수취인을 만나 서명을 받고 반드시 교부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등기우편도 스마트우편함에 넣는 것만으로 대면 배달을 생략할 수 있도록 법까지 개정된 것이다. 우정사업본부가 스마트우편함을 도입할 경우 집배원들의 업무시간이 평균적으로 1시간 가량 절감될 것으로 기대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A아파트
스마트우편함에
등기우편을 배달하면 우편물이 수취인 모르게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상태다. 더구나 스마트우편함에 등기우편을 넣기만 하면 수취가 완료된 것으로 간주하도록 법이 개정됐기 때문에 만약
등기우편이 분실된다면 이를 책임질 주체조차 확실치 않게 된다. 결국 비대면으로 등기우편 수취가 가능토록 해야하는 스마트우편함의 기능은 유명무실하게 됐다.
CBS는 LH측에 이런 하자 많은 스마트우편함을 도입한 이유를 공식 질의했다. 이에 LH측은 문제의 책임이 시공사에 있다고 주장했다. LH관계자는 "설계나 시공, 자재 선정, 하자, 보수에 대해서 다 책임이 건설사에 있다. 이게(스마트우편함) 우리가 자재를 선정해 납품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건설사가 업체 선정을 해서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LH 아닌 시공사 탓? 해명에도 짙어지는 의혹들
하지만 LH의 해명은 A아파트를 시공한 건설사의 설명과 전혀 달랐다. 해당 건설사 관계자는 "LH에 (스마트우편함) 공사 시방서가 있고 그 기준에 맞춰서 납품할 수 있는 업체풀이 이미 다 구성돼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는 4개 업체들 가운데 건설사가 최저입찰을 통해 납품받은 것이 지금의 스마트우편함이다"라고 말했다.
시공사가 입찰을 진행하지만 선택지는 LH에 의해 주어진다는 설명이다. 납품 받은 물품에 대한 검수과정은 없느냐는 질문에 "LH 시방서 기준에 맞춰서 시공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고 업체풀이 꾸려지면 따로 점검을 하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LH가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LH 분양주택에 설치된 스마트우편함 가운데 A아파트에 설치된 것과 동일한 A사 제품의 비중이 총 51개 단지, 79.59%로 압도적이었다. 추정금액만 약 55억여원에 이르는 규모다.(2024년 3월 기준)
구형 우편함과 기능 면에서 별 차이도 없는 스마트우편함을 설치하기 위한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전가됐다.
A아파트 스마트 우편함 측면에 붙은 안내문. 아파트 관리소 측에서 남의 우편물에 손을 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정상적인 스마트우편함의 보안기능이 작동한다면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LH는 A아파트와 같은 제조사의 스마트우편함을 설치하는데 55억여원을 들인 것으로 확인됐다(2024년 3월 기준). 김중호 기자 업무 관련이 없다는 해명과는 달리 LH는 현장조사를 직접 실시하기도 했다. 민 의원실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LH는 지난해 10월 기술기준 미준수, 납품의혹과 관련해 현장조사를 2차례나 실시했다. 하지만 점검 결과에 "LH 시방기준, 관련법령 미준수사항 없음"이라며 문제점은 없었다고 의원실에 보고했다.
LH는 CBS측에도 "자재 선정, 하자, 보수에 대한 책임은 건설사에 있다"고 해명하면서, 지난해 말 2차례나 제조업체를 동반해 현장조사에 나선 사실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업계 내부에서는 LH가 스마트우편함 결함을 은폐하려한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재명 정부 들어 LH는 주택공급의 가장 큰 주체로 부각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력한 개혁대상으로도 꼽히고 있다. LH는 약 2년 전 윤석열 정부 당시 인천 검단 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사고를 겪었고, 4년 전에는 직원들의 3기 신도시 땅투기 사건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