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준혁. 에이스팩토리 제공'요아정'(요즘 아저씨의 정석)부터 '얼굴 천재'까지, 배우 이준혁은 40대에 '멜로'로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SBS 금토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 일만 잘하는 헤드헌팅 회사 CEO 지윤 역의 배우 한지민과 로맨스 호흡을 맞췄다. 그 동안 강렬한 장르물에서 많이 활약했지만 완벽한 비서이자 싱글대디 은호 역이 딱 맞아 떨어지며 새로운 길을 개척한 셈이다. 이준혁은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드라마 성공의 공을 스태프들에게 돌렸다.
"우리 직업이 가장 아름다운 지점은 그런 거 같아요. 저는 제가 현장에서 가장 비싼 소품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아끼는 거죠. 만약 제가 다치거나 하면 제작비가 늘어나잖아요. 또 저를 가지고 더 멋있게 보여지게 하려고 모두들 노력하는 거고요. 그렇게 한 팀이 되어서 만들어 간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화면에 나오는 절 보면 잘 나왔다고 느껴지는 지점이 있어요. (웃음) 어쨌든 프레임 속에 있는 저는 은호인 거고, 저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러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멋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해서 제 캐릭터를 만들었는지 증명할 수 있게 되는 거 같아요."
보통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장르물과 달리 대단한 목표를 추구하거나 구현하지 않는다. 여자 주인공과의 설레는 교감·감정 연기가 가장 중요한 과업이기 때문. 이준혁은 이 같은 로맨스 드라마의 포인트를 이미 알고 있었고, '상대를 받쳐주는 연기'를 '나의 완벽한 비서'에 그대로 적용했다.
"은호라는 캐릭터가 어려웠던 지점이 이미 2회가 됐을 때 목표 지점이 상실됐거든요. 아이 치료와 회사 입사가 목적이었으니까 그 후엔 목표가 없는 거죠. 그 때부터는 사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제가 '리액팅'(반응) 해주는 과정으로 이뤄져 있어요. 그래서 그 부분에서 튀지 않으려고 했어요. 밴드라고 치면 보컬처럼 앞으로 나서서 '내가 멋있다'고 강조하는 순간 잘못될 수도 있다고 느꼈어요. 기타나 베이스처럼 밑에 깔리는 음으로 존재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은호가 어느 순간부터는 일에 정답을 말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인데 뻔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 묘한 행동을 해서 불규칙성을 넣는데 집중했어요."
배우 이준혁. 에이스팩토리 제공'40대'의 이준혁이 인기를 얻으면서 '20대'의 이준혁 역시 새롭게 조명 받았다. 지금과 달리 수염에 '남성적인' 스타일을 고수해 온 사진을 두고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수염만 없었어도 성공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따라오기도 했다. 누구보다 로맨스에 잘 어울리는 얼굴인데도 장르물을 선호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따라온다.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하게, 독특한 역할을 하는 걸 지금도 좋아해요. 그러니까 오히려 독특하지 않은 은호가 제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독특한 캐릭터가 됐어요. 수염을 길렀던 건 그 때는 또 수염이 있어서 캐스팅이 됐거든요. 수염이 멋있게 나는 게 제 자랑이었고, 배우들이 일부러 발모제를 바르기도 했어요. 유행이 돌고 도는 걸 이렇게 체감하네요. 그 당시엔 저도 만족했었고, 의상도 수염에 어울리는 스트릿 의상이었어요. 밖에 나갈 때 수염이 없으면 좀 쑥스럽기도 했던 거 같아요. 그 때도 지금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웃음)"
외모로 인해 연기적 노력들이 덜 부각되는 지점에 있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세상에 모든 게 좋은 면만 있을 수는 없고, 또 나쁜 면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 이준혁은 외모 평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보다는, 환경에 따른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연기관 역시 '유연함'과 맞닿아 있다.
"20년 간 노력을 바꿔 생각하면 제가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외모로 호평을 주시는 것도 있거든요. 상쇄가 되는 거 같아요. 외모가 진짜 그렇지 않더라도 여전히 매스미디어의 세뇌작용은 살아있는 거 같아요. 잠시만 속아주세요. 배우는 요리하는 재료니까 신선도를 유지해야 하고요, 또 생각이 있어서 산낙지처럼 움직이는 건데 좋은 감독님이 요리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저 스스로 변주할 수 있어야 된다고 봐요. 양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을 탐험하고, 느끼고, 자양분을 얻으면 좋은 감독님이 요리해주시지 않을까요?"
배우 이준혁. 에이스팩토리 제공상대역이었던 한지민은 이준혁에겐 든든하고 프로페셔널한 '동료'였다. 이미 수차례 로맨스 연기를 거듭하면서 '장인'이 된 한지민은 '나의 완벽한 비서' 현장에서도 그 기량을 아낌없이 펼쳐 보였다는 후문이다.
"동료들에게 감사함이 커지는 시기예요. 제가 배우이기도 하지만 소비자거든요. 실제 배우들의 노력을 보면 굉장히 좋고, 고마우면서도 고충이 느껴지기도 해요. 어떤 작품이 성공하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부분이고, 연기가 좋은 것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니까 답은 없는데, 현장에는 답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한지민씨는 굉장히 성실한 배우고, 든든하면서 프로페셔널한 동료였어요. 제가 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는 장면들도 기가 막히게 잘 살리더라고요."
로맨스 연기이다보니 실제 연애 경험담이 녹아든 부분도 있을까. 이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한 때는 그런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과몰입'을 유발하는 접근법은 지양한다고.
"전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그 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걸 늘 실제로 수용할 수는 없잖아요. (웃음) 문법과 규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움직여야 된다고 봐요. 오히려 그런 건 지양하는 편이에요. 실제 경험이 들어가면 재미가 없을 거 같거든요. 그런데 과거에는 시도를 해본 적은 있어요. 현실에서도 계속 예민하게 유지하고 그랬거든요. 당시 유행이었던 거 같아요. 사람들하고 말도 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했었던 기억이 나요. 물론 지금도 필요한 교육이라면 하겠지만 평소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배우 이준혁. 에이스팩토리 제공평소 감자칩과 피자 마니아로 잘 알려진 그에게 평생 숙제는 바로 '식단'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가 종영했지만 바로 작품에 들어가서 여전히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처지다. 그래도 배우로 활동하는 이상 자기 관리는 어쩔 수 없이 필수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먹어도 살 안 찌는 배우들이 진짜 있는데 저는 그것도 천부적 재능이라고 봐요. 한지민씨가 촬영 전날에 라면 세 개를 끓여 먹어도 얼굴이 안 부어요. 그럼 전 상대적 박탈감 느끼고. (웃음) 과자를 좋아해서 너무 먹고 싶은데 요즘 못 먹으니까 다이어트 단백질 과자를 여섯 박스나 주문했어요. 화보 찍느라 이틀 간 두 끼 정도밖에 못 먹은 거 같아요. 잘 먹을 수 있으면 우울감이 없어질 거라고 100% 확신해요. 우울감의 대부분은 음식을 못 먹는 데서 나오거든요. 불행한 시기에 먹는 게 저를 지탱해줬는데 오히려 일이 잘되면서 피자를 못 먹으니까 참 모순 같아요. 피부 관리도 열심히 해요. 피부과 가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생존하려고 가는 거죠."
배우로서의 '생존' 또한 이준혁에게는 중요했다. 쉬지 않고 일하는 습관은 이런 마음에서 생겨났다. 지금은 물론 예전처럼 다음 일거리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작품의 반응이 좋으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다작의 부담감이나 무게감에도 익숙해졌다.
"배우가 꾸준히 작품을 하는 건 '오징어 게임'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스타가 되면 쉬고 싶다는 판타지가 있었어요. 저는 원래 제 안을 채우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쉬는 게 좋은 시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젠 그런 시기가 한참 전에 지나간 거 같아요. 제 직업이니까 계속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요. 지치는 순간도 있죠. 그래도 새롭게 자극 받을 수 있게 다양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원동력이 됐어요. '나의 완벽한 비서'도 제가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있긴 했어요. 여러 작품을 같이 촬영하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부담감과 무게감에 익숙해진 거 같아요. 건강하게 계속 연기할 방법을 찾아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