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의료기관평가인증원장을 역임한 이규식 연세대 명예교수. 김정록 기자"국민들이 원하는 시점에 매우 편리하게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체계 이면을 보면 붕괴의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초대 의료기관평가인증원장을 역임한 이규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정부가 의료개혁을 화두로 들고나오기 전부터 '의료 붕괴'를 예고했다. 그는 "이대로면 2030년 중반쯤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그야말로 '빅뱅'이 터질 것"이라며 의료 붕괴가 코앞까지 왔다고 지적해 왔다.
그렇다면 지난해 정부가 의료 붕괴를 막겠다며 들고 나온 의료개혁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 교수는 "의료 붕괴의 '빅뱅'을 더 앞당긴 꼴이 됐다"고 비판했다. CBS노컷뉴스는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정부 '의료붕괴' 진단에는 동의하지만…증원으로 해결 안돼
정부는 지난해 지역의료가 소멸하고 이른바 '필수의료' 분야가 붕괴할 것이라며 의료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교수도 정부의 발상에는 동의했다.
그는 "이미 응급환자들이 치료처를 찾지 못해 앰뷸런스에서 대기하다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소아청소년과는 개업을 해도 환자가 줄어 다른 개업의에 비해 낮은 소득에 견디기 어려워 폐업을 선언할 지경이다. 수도권 대형병원의 등장으로 의료자원이 수도권으로 빨려들어 지방의료도 붕괴할 수준에 왔다"며 의료 붕괴 위기에 닥친 것은 맞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가 이를 해결하려고 내놓은 의과대학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 내용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이 교수는 "의료 위기를 맞은 이유는 정부가 '의료 사회화' 개념을 몰라서"라고 진했다.
그는 "'의료 사회화'란 보험료는 경제력에 비례해 징수하지만 의료 서비스는 내가 낸 보험료와 무관하게 누구나 똑같은 조건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를 단지 재정을 공동으로 조달하는 방식으로만 이해하면서, 전 세계에서 의료 이용을 가장 많이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건강보험 통합으로 진료권을 폐지하면서 수도권으로 의료 이용이 집중됐다. 환자가 수도권으로 몰려드니, 의료 자원도 환자를 따라 수도권에 집중됐다. 결국 지역의료의 붕괴로 연결돼 지역 주민들이 의료 이용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과거처럼 전국의 진료권을 나눠 환자들이 의료기관을 단계적으로 이용하도록 유도했다면 지금처럼 지역의료가 붕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료권 폐지·비급여 자유…'의사 쏠림 현상 심화'
또 다른 측면으로 '의료 영리화' 문제를 꼽았다. 의료기관이 비급여서비스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전문 과목별로 수익 차이가 벌어졌고, 이에 따라 의사 쏠림도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건강보험제도가 통합되면서 비급여서비스 제공을 허용함은 물론, 급여서비스와 비급여서비스를 같이 제공하는 '혼합진료'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더구나 비급여서비스 가격을 의료기관이 자율적으로 책정할 수 있게 하면서 의료가 영리화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결국 비급여서비스를 많이 할 수 있는 피부과·안과·성형외과 의사와 그렇지 않은 소아청소년과·산부인과·응급의료학과 의사의 연봉이 4~5배 이상 차이가 나게 되니 수입이 높은 쪽으로 쏠리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의료인력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안과 전문의의 연평균 임금은 3억 8900만 원, 신경외과 3억 2600만 원, 피부과 2억 8500만 원, 재활의학과 2억 8천만 원순으로 높았다.
반면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1억 3500만 원, 산부인과 2억 3700만 원, 응급의학과 2억 3400만 원, 흉부외과 2억 2600만 원 등으로 이른바 '필수의료' 분야 전문의 연봉이 상대적으로 낮은 축에 속했다.
"의사 수 부족한 면 있어…의약분업 때 줄인 350명분 증원"
이 교수는 이 토대를 개혁하는 '진짜 의료개혁'이 아니라면 의료붕괴를 막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아무리 의대 정원을 늘려도 배출된 의사들이 현재 부족한 곳으로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1989년 이후에 실시했던 진료권 또는 환자의뢰체계 강화 같은 정책을 새롭게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또 의료 영리화를 방지하기 위해 비급여서비스 제공을 근절할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건강보험의 영리화를 방지하기 위해 혼합진료를 금지해 비급여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며 "독일의 경우 공공병원과 민간병원(영리병원)을 구분해 공공병원에서는 비급여서비스를 하지 못하도록 관리한다"고 말했다.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부 동의했지만, 정부가 제시한 '2천 명'은 과하다며 선을 그었다.
이 교수는 "OECD 평균과 비교했을 때 한국 의사 수가 적긴하다. 의사를 늘린다면 의약분업 과정을 거치면서 2003년부터 3년간 351명이 감축된 부분을 채우는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배출이 안 된 약 7천 명을 채우기 위해 정원을 700명 증원하자는 것"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