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문영걸 목사. 이상성 목사삶이 아름다운 크리스천을 만나는 시간, 로드인터뷰 사람꽃. 오늘은 제주반석교회 문영걸 목사를 제주CBS 목회자 기자인 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가 만나봅니다.
◆이상성> 98년도에 중국의 용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걸로 압니다. 그곳은 윤동주 시인 생가가 있는 곳이잖아요. 일제강점기 때 선조들이 모여서 독립운동을 한 곳이기도 하고, 용정에는 어떻게 살게 된 겁니까.
◇문영걸> 저희 아버지가 4살 때, 할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철원에서 두만강 건너 용정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용정에서 출생했고요.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대학교부터 큰 도시로 나가게 됐습니다.
◆이상성> 예수님을 믿은 건 언제부터입니까.
◇문영걸> 제가 27살 때였습니다. 그분이 신분을 밝히진 않았지만 선교사인 것 같았어요. 그분이 제게 성경 한 권을 선물로 주셨고, 일주일 동안 성경공부를 시켰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인정하는 똑똑한 아이였고,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터라 그분에게 엄청 까다로운 질문을 하면서 괴롭혔습니다.
얼마나 그랬던지 그분이 나중에는 '너도 목사가 돼서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이 괴롭힘, 다 당하게 될 거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일과 말씀이 늘 뇌리에 남아있던 것, 그것이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금의 제 아내를 만나게 된 일인데, 저희 아내 집안은 오래전부터 예수를 믿었던 집이었습니다. 아내도 용정 출신이고, 장인 어르신이 두만강 건너왔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저희 장모님은 용정교회에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용정교회 절반 이상이 장모님 전도로 왔고요. 당시는800명 이상 예배드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런 믿음의 가정이 제 믿음의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중국 신학교에서의 강의 모습. 문영걸 목사 제공◆이상성> 그러다가 한국으로 와서 감리교 신학대학인 목원대학교에 입학하고 목사님이 됐는데, 한국으로 오게 된 계기와 이 학교를 다니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문영걸> 아내를 만나서 결혼 준비를 할 때, 장모님이나 제 아내가 북한 선교에 열심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뜨거운 마음이 있었지만 북한에 갈 수는 없었는데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신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2,3년 정도 계획하고 아내와 같이 목원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목원대학교로 가게 된 이유는, 중국과 한국이 92년도에 수교하면서 이후에 용정의 백두산으로 단기선교를 오시는 분들이 많았는데요. 이분들 가운데 대전에 사는 어떤 목사님을 만나게 됐고, 그분의 소개로 목원대학교를 오게 됐습니다. 불법체류 문제가 심각하니까 신원보증도 해주시고 학교까지 추천해 주셨는데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느낍니다.
◆이상성> 근데 대전을 떠나서 충남 당진의 당진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을 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문영걸> 목원대학교 선교훈련원 훈련도 마치고 선교사 파송 자격을 얻었지만 선교사로 파송받으려면 저희 교단의 후원교회, 파송교회가 있어야 되는데요. 근데 제가 전도사로 섬겼던 대전의 교회는 이런 형편이 안 됐어요.
그 시점에 선교훈련원장으로 계시던 목사님이 저를 충남 당진의 당진교회 목사님에게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당진교회 담임 목사님이 현재 우리 교단의 감독회장 하시는 이철 목사님이셨어요.
당진교회가 그때 교회 설립 70주년이 되는 해인데, 선교사는 한 명도 파송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역사적인 첫 파송 선교사로 제가 선택받았습니다. 12년 동안 파송선교사로 사랑도 많이 받고 후원도 받으면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상성> 그래서 다시 중국으로 가서 사역을 한 거군요.
◇문영걸> 선교사로 파송받기 전, 제 인생에 획기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겁니다. 사실 저희 부모님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에 사는 부모님은 평생 남의 나라 땅에 산다는 느낌이었나 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우리는 조선인이다' 늘 말씀하셨고 '내 아들은, 우리 손자는 조선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제가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했을 때 가장 눈물 흘리며 기뻐했던 것이 아버지였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제대로, 제 나라에 살게 됐다. 제자리를 찾았다' 이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이상성> 중국에서는 어떤 사역을 주로 했습니까.
◇문영걸> 주 거점은 북경이었고요. 제가 선교에 대해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선교에는 전략이 필요하고 강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중국은 지역도 넓고 사람도 다양해서 중국 지식인에 대한 선교 전략이 제 꿈이었습니다.
지식계층이 가장 밀집돼 있는 대도시, 그중에서도 북경을 제가 목표로 삼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기적같이 인도해 주셔서 저도 중국 지식인으로 인정을 받고 그들과 사적인 교류도 가지면서 나중에는 전도 선교의 열매들도 많이 맺게 됐습니다.
◆이상성> 그래서 북경대를 가게 된 겁니까.
◇문영걸> 주변에서는 제 취미가 박사학위 수집하는 거냐고 하는데, 제가 지식인들 상대로 인정을 받으려면 북경대 철학과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권위 있는 학교이자 학과였거든요. 대학에서 인연을 맺은 교수와 북경대 출신들이 나중에는 제 인맥이 됐고, 이후의 사역에도 큰 발판이 됐습니다. 물론 다른 대학교의 지식인들과도 많은 교류를 했습니다.
2022년에 북경의 모 대학교 교수님이 '성탄 묵상'이라고 하는 대강절 묵상집을 출판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걸 공개하면 본인의 진로에 상당한 타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하고 싶었다고 하신 겁니다. 저는 그게 성령의 감동이라 봅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저에게 한국에 번역해서 소개해줄 수 없냐는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과감하게 도전해 자비까지 들여 출판을 했습니다.
◆이상성> 그러다가 중국에서 추방된 거죠.
◇문영걸> 코로나 직전에 중국에서 선교사들을 거의 숙청하듯이 하나씩 다 색출해 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한테도 2018년 2월에 찾아왔습니다.
제 주된 사역이 지식인 대상, 문서사역이었습니다. 교회나 목회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교재들 편찬을 많이 했거든요. 이 자료를 검열받아야 하니까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결국 출국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50이 넘은 나이에 다시 당진교회로 왔는데요. 늦은 나이에 온 저를 다시 부목사로 받아준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1년 동안 부목사로 섬기다가 제주반석교회로 오게 됐습니다.
장로은퇴, 취임예배 당시 모습. 문영걸 목사 제공◆이상성> 제주에 온 된 계기는 어떻게 됩니까.
◇문영걸> 백두산에서 만났고, 목원대학교를 소개하면서 신원보증을 서 주셨던 목사님이 2016년부터 제주반석교회 담임으로 계셨습니다. 조기 은퇴 계획을 밝히시고 제게 의향을 물어보셔서 2019년 오게 된 겁니다.
◆이상성> 지금 중학생 딸이 한 명 있는 걸로 압니다.
◇문영걸> 결혼 12년 만에 하나님이 딸을 주셨습니다. 유산을 여러 번하고 심지어 임신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입양하려고 서류받으러 가자는 저녁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희 부부가 마흔 살이 넘어서 낳은 딸이 너무 귀해 '경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상성> 목사님은 미도중국연구소를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는데, 소개를 해 주시죠.
◇문영걸> 북경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체계를 갖춘 연구조직을 갖고 싶었습니다. 아직 상임연구원은 저 혼자뿐이지만 필요할 때마다 중국의 학위 가진 동지를 통해서 계속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역사나 문화, 또 종교적인 다양한 접근법으로 중국 선교 전략을 구상해 보고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그 와중에 중국에 필요한 문서 사역도 연구소 통해서 하고 싶었고요. 16년 동안 운영하면서 대외적으로 세미나와 논문을 발표할 때는 미도중국선교연구소 이름으로 합니다.
◆이상성> 미도중국연구소에서 우리나라 3.1운동과 5.4운동의 관계에 대한 문헌을 찾아내 일간지에 소개되기도 했잖아요. 어떤 내용입니까.
◇문영걸> 3.1운동 100주년이 되기 전인 4년 전부터 북경대학의 박사과정을 활용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자료들을 꾸준히 수집했습니다.
3.1운동과 관련된 중국의 반응들, 특히 그 당시 신문, 잡지에 나왔던 기사나 논평을 모아서 100주년이 될 때 기독교 사상이라는 월간지에 발표를 했습니다.
3.1운동 당시 중국의 신문과 잡지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 반응이 결론적으로는 바로 이어지는 중국 5.4운동과 직결이 된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중국 5.4운동의 리더들이 당시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보니 3.1운동이 언급돼 있었습니다.
조선인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조선이 작은 약소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비폭력적으로 독립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핍박받는 비슷한 상황에 있던 중국이 부끄럽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그걸 찾아낸 겁니다.
1919년 3월 23일 '매주평론' 제14기에 실린 천두슈의 글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감상'. 문영걸 소장 제공
◆이상성> 제주반석교회 사역에서 보람이나 어려운 점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문영걸> 제주반석교회 담임으로 오니까 마음가짐부터 달라지더라고요. 한 명, 한 명의 성도님들의 소중함도 절감하게 되고요. 비록 아직 성도 수가 많지 않은 작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충실하면서 또 행복했던 시간을 지금 5년 동안 제주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많지 않은 성도이지만 이들과 함께 천국 가는 그 길, 아름다운 길의 동행자로 걸어간다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가장 큰 보람이 되고요.
5년 동안 목회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긴 한데요. 다양한 목회자들을 통해 다양한 은사들이 드러나겠지만 오직 말씀을 붙잡고 말씀에 기반한 믿음, 그래서 교회 이름처럼 말씀이 반석이 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해요.
전도 잘할 수 있는, 말씀으로 온전히 준비되는 그런 교회 목회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제주반석교회 . 문영걸 목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