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영화관에 범죄도시4 포스터 모습. 연합뉴스"'챌린저스' 보고 싶은데 상영관이 없네요."
"'정순' 상영관이 너무 적어서 아쉬워요." 영화 '범죄도시4'가 개봉 9일 만에 6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빠르게 '천만영화'를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 한편에서는 영화의 다양성과 관객들의 선택권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멀티플렉스 극장 3사 스크린의 70~80%가량이 '범죄도시4'에 배정되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영화들의 상영 기회가 줄어든 탓이다.
극장 10개 스크린 중 8개는 '범죄도시4'
'범죄도시4'는 개봉일인 4월 24일부터 5월 1일까지 8일 동안 하루 평균 약 2861개 스크린에서 1만 5851회 상영하며 상영점유율(전체 영화 상영횟수 중 해당 영화 상영횟수 비율) 80.1%, 좌석점유율(극장 총 좌석 수 중 해당 영화에 배정한 좌석 수 비율) 83.7%를 기록했다. 상영점유율과 좌석점유율 최고치는 82%, 85.9%(4월 27일)다.
이에 반해 '범죄도시4'와 같은 날 개봉한 외화 '챌린저스'와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인 한국 영화 '여행자의 필요'의 상영점유율은 3.5%, 0.4% 좌석점유율은 2.95%, 0.3%에 그쳤다.
'범죄도시4'의 기록은 이전 '천만영화'들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수치임을 알 수 있다. 앞서 올해 첫 '천만영화'에 오른 '파묘'의 경우 가장 높은 상영점유율은 56%(3월 5일), 좌석점유율은 59%(3월 3일)로 나타났다. 점유율이 40% 이상을 보였던 개봉 27일 동안 평균 상영점유율과 좌석점유율은 각각 50.48%, 54.04%로 나타났다. '서울의 봄' 역시 개봉 27일 동안 상영점유율과 좌석점유율의 평균을 낸 결과 52.97%, 58.6%로 나타났다.
과거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일으켰던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작품인 '겨울왕국2'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비교해도 '범죄도시4'의 점유율은 높은 편이다. 개봉 후 8일 동안 '겨울왕국2'의 상영점유율과 좌석점유율은 평균 62.39%, 68.95%를 기록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경우 평균 78.01%. 82.7%를 기록했다.
특히 전국 극장 스크린의 93.5%(2023년 기준, '2023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참고)를 차지하고 있는 멀티플렉스 극장의 '범죄도시4' 상영점유율(4월 24일~5월 1일 기준)은 △CGV 81.93% △롯데시네마 80.16% △메가박스 80.36%로 평균 약 80.8%로 나타났다.
서울 시내 한 멀티플렉스 극장의 5월 3일 '범죄도시4' 상영시간표 일부.다양성 사라진 극장에서는 '포스트 봉준호'도 없다
스크린 독과점에 관한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극장들은 소비자인 관객의 주권과 영화 산업의 발전,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경영 위기 타개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스크린 독식 상태에서 '천만영화'가 나온다 해도 승자독식 구조에서는 장기적으로 한국 영화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상영 기회의 불공정성은 흥행의 양극화, 즉 '부익부 빈익빈'으로 나타난다. '천만영화'가 스크린 10개 중 8개를 차지한 상황에서 나머지 2개를 두고 남은 영화들이 경쟁해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독립·예술 영화 등 작은 영화들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영화정책 전문가인 노철환 인하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는 2일 CBS노컷뉴스에 "'범죄도시4'가 시장 수익의 80~90%를 가져간다는 건 말 그대로 남은 영화들이 가져갈 수 있는 파이가 너무 작아져 버린다는 것"이라며 "극장들은 관객들이 재밌어 하니까 많은 스크린을 배정한다고 하는데, '범죄도시' 시리즈만으로는 전체적인 영화 시장은 절대 커지지 않는다. 결국 한국 영화 다양성뿐 아니라 시장 전반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관객들이 원하는 영화라서 많은 스크린을 부여한다고 하지만, 관객의 선택지를 한 가지로 좁힐 수 있다는 점은 시장 독과점의 폐해다. '천만영화' 흥행에만 집중할 경우 관객 쏠림 현상을 막을 수 없으며, 극소수 '천만영화' 공백 시에는 결국 극장을 찾는 관객의 발길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찌감치 한국문화경제학회가 발간한 '문화경제연구'(2018년 4월) 중 '한국 영화산업의 집중성과 불균형의 맥락들'에서도 "한국 영화시장은 변화의 측면인 국적별, 장르별 다양성은 낮지 않으나, 균형 측면인 상영 기회와 소비가 특정 영화에 집중되는 현상은 강하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중소영화사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에 대한 지원과 유통망을 확보하는 방안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영화, 소형 영화들에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다시 새로운 시도로 이어진다. 봉준호 감독이 칸영화제와 오스카를 휩쓸 수 있었던 시작점에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영화들이 설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보장하는 것은 생태계 선순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노철환 교수는 "프랑스는 우리나라보다 '천만영화' 숫자는 적지만 다양한 스코어의 영화가 훨씬 많고, 그렇게 살아남은 감독이 다음 영화를 만든다"며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웬만한 감독은 차기작을 찍을 수 없고, 그러면 '포스트 봉준호'도 나올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화면 캡처.
'스크린 상한제', 다시 한번 스크린 독과점 해법으로 떠오를까
지난 2020년 1325명의 영화인이 참여한 '영화산업 구조개혁 법제화 준비모임'(이하 준비모임)이 요구한 '포스트 봉준호법'(가칭) 속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해법 중 하나가 바로 '스크린 상한제'(한 영화가 차지하는 영화관 스크린의 수나 그 비율이 일정한 기준을 넘지 않도록 제한하는 제도)다.
프랑스의 경우 8개 스크린 이상 소유한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이 일간 상영 횟수의 30%를 초과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을 담은 편성약정이 존재한다. 이를 국내 사정에 맞게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극장들로 구성된 한국상영발전협회는 "법으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최대 비율을 제한하는 것은 소비자 관객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며, 수요가 높은 영화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다른 영화 상영 기회를 보장하는 것은 오히려 산업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행위"라며 스크린 상한제에 반발한 바 있다.
이처럼 스크린 독과점 해법을 둘러싼 이견도 상당하지만, 많은 전문가와 관계자들은 스크린 상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스크린 독점 방지법이 발의됐던 2016년 발표된 '한국 영화산업의 수직통합 및 독과점화에 대한 공법적 대응'에서도 "영화를 단순히 시장의 논리로 재단해 규격화하거나, 관객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소수의 예술·독립영화가 시장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이는 영화가 가진 문화적 가치를 위협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훼손"한다며 스크린 수 제한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노철환 교수 역시 "스크린 상한제 논의를 다시 해야 한다. 특정 영화가 독식하기보다는 특정 영화를 어느 정도 밀어줄 필요는 있지만, 다른 영화에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형태로 합리적인 형태를 찾아가야 한다"라며 "관객들이 다양한 영화에 재미를 느꼈을 때만이 장기적으로 영화를 자주 보게 된다"라고 강조했다.
결국 여러 해법은 '다양성'으로 귀결된다. 관객의 선택지를 늘리고, 그 선택에 부합할 수 있도록 극장 역시 다양한 영화들의 상영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스크린 독과점 해법의 핵심이다.
이러한 일환에서 노 교수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영국, 미국, 독일 등에서 도입되고 있는 '영화관 구독제 프로그램'을 통한 다양성 강화와 영화산업의 지속 성장을 언급하기도 했다. 영화관 구독제 프로그램이란 월정액을 지불하고, 무제한 또는 월정액을 크게 웃도는 영화 관람 혜택을 부여하는 회원제 프로그램이다. 팬데믹 이후 미국, 영국, 독일에서도 구독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노 교수는 "구독제를 시행할 경우 다음에 볼 영화가 없으면 안 되므로 극장이 다양한 영화를 틀 수밖에 없다"라며 "관객들이 와서 다양한 영화를 봐야 장기적으로 영화 산업도 살아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