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민 기자정부가 2025학년도 대학입시부터 의과대학 정원을 2천 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하자, 의료계에서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당장 이틀 앞으로 다가온 설 명절(9~12일)은 큰 영향이 없겠지만,
연휴 직후 대한의사협회(의협)를 포함한 의료계 집단행동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의료개혁을 위한 '필요조건'으로서의 의사인력 확충은 지난 6일 정부 발표로 본 궤도에 오른 반면 코로나19 유행 이후 지난해 1월 26일 재개된 의(醫)-정(政) 협의는 1년여 만에 파국으로 치닫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7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의료계는 지난달 말부터 '빠르면 이달 초 최소 1천 명 확대를 골자로 한 정부안(案)이 발표된다'는 언론 보도가 잇따르면서, "실제 강행 시 총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 왔다.
막상 지난 1일 민생토론회에서 공개된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에서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의대 증원 수치는 빠졌다. 대신 패키지엔 이른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 진료과의 수가를 집중적으로 인상하고(2028년까지 건강보험 재정 10조 이상 투입) 의료사고 관련 형사처벌 부담을 덜어주는 내용이 담겼다.
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2024년 제1차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 참석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위원장). 조 장관은 "의료계를 존중했기 때문에 의료현안협의체를 꾸려 28차례 (의대 정원 등을) 논의한 것"이라며 의대정원 확대가 정부의 일방적 결정이라는 대한의사협회 주장을 반박했다. 이은지 기자 이는
자칫 의대 정원규모에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될까 우려한 정부의 의도적 분산인 동시에 '의료계 달래기'를 위한 일종의 당근책이었다는 분석이다. 그간 의협은 의대정원 확대보다 지역·필수의료 인프라를 확실히 살리고 젊은 의사들이 해당 진료과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게 먼저라는 입장을 밝혀 왔다.
다만 기대와 달리, 미용·성형 등 비급여와 급여항목을 섞은 '혼합진료' 금지, 일정 기간 임상수련을 마쳐야만 개원 권한을 주는 '개원 면허제' 도입 검토 등은 되레 의료계의 반발을 불렀다.
지난 2017년 의료진이 구속된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사건을 인용하는 등 대통령까지 나서 제정에 힘을 실은 '의료사고처리특례법'도 사망사고 포함 여부 등은 유보해 추진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게 의협의 주장이다.
의협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너무 비약적인 내용이 많았다. (의료현안협의체에서) 논의되지 않은 내용을 그냥 다 (정책패키지에) 실은 것"이라며 "사실상 뉘앙스로 보면 '비급여 쪽으로 도망갈 생각하지 마라'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전날 발표까지 다소 급박하게 돌아간 '타임라인'도 논란을 불렀다. 27차례에 걸친 협의체 논의로 의료계의 요구를 일정 반영한 필수의료 정책패키지가 설령 의대 확대의 '명분'을 쌓았다 해도, 설 직전 이같은 기습발표가 이뤄질 거라는 시각은 많지 않았다.
앞서 정부는 업무강도·중요도에 비해 저평가된 필수의료가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행위별 수가제를 보완하고 공공정책수가를 도입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을 주말인 지난 4일 발표했다.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와 연동되고 국민 생활과 밀접한 정책 청사진인 만큼 주목도가 높은 평일에 발표하리란 게 대체적 관측이었지만,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설 전에 의대정원을 발표하려고 날짜를 맞추는 게 아니냐'는 불만도 제기됐다.
이에 더해 전날도, 오전에는 28차 의료현안협의체, 오후엔 의료 공급자·소비자·전문가가 모이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가 개최됐다.
정책 발표 당일에 의견수렴 절차를 다 몰아넣은 셈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서두를 이유가 있었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정부가 의대 입학정원 증원 발표를 앞둔 지난 6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대강당에서 이필수 의사협회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황진환 기자특히 의·정 협의체는 의협 협상단이 미리 준비한 항의성 입장문만 읽고 4분여 만에 퇴장해, 제대로 된 '회의'가 이뤄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동시간대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는 이필수 의협회장이 총력 투쟁을 경고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정부가 2020년 9·4 의정합의 정신을 위반하고 의료현안협의체를 통한 의료계와의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의대정원 확대 발표를 강행할 경우, 의협 제41대 집행부는 총사퇴할 것"이라며 "즉각적인 임시대의원총회 소집 및 비대위 구성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난해 12월 실시한 파업찬반 전 회원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하고, 이에 따라 즉각적인 총파업 절차에 돌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부가 '최종' 의사결정단계로 지목한 보정심에서도 1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논의가 진행됐다. 참석위원들 사이에선
'의대 정원처럼 중요한 사안을 이렇게 (졸속으로) 의논·결정하는 게 맞느냐'는 지적이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조규홍 복지장관이 위원장인 보정심은 노동자·소비자·환자단체 등이 추천하는 수요자 대표, 의료단체가 추천한 공급자 대표, 보건의료 전문가와 정부 부처 관계자 등 참여하는 위원만 25명이다. 이번 발표가 '총선용'이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온 배경이다.
무엇보다 의료계에서는 '당장 파업이 문제가 아니'라는 관점이 중론인 것으로 파악됐다. 국민적 관심이 뜨거운 의대정원 문제가 이미 보건의료 이슈의 틀을 넘어서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의협 관계자는 "이제는 총선까지 장기적으로 보고 대응을 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게 회원 대부분의 의견"이라며
"현장 종사자 간 논의나 협의는 전무하고 그냥 정해진 '답'에 맞춰갈 뿐, 의료나 행정적 사안이 아니고 복지부도 '실권'이 없는 것 같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이어 "(의협 차원에서) 정상적·합리적 대응은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집행부의 판단이고, 그래서 총사퇴도 언급된 것"이라고 부연했다.
내부적으로는 이번 발표가 설 밥상에 '김건희 특검'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격양된 여론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대 확대를 비롯해 현 정부의 의료정책으로 수혜를 입은 특정 여권 인사들을 4월 총선에서 '낙선'시켜야 한다는 논의도 물밑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의협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증원규모를 여러 번 물었지만 의료계가 응하지 않은 것이라는 정부 측 주장에 대해서는 "저희는 지금 '초가삼간'이 불타고 있는데 자꾸 (정부가) '10년 후 꽃밭'에다가 물을 더 주자고 하니, 이 불부터 끄자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의협 등이 파업 등 집단행동에 나설 경우, 법으로 정한 모든 제재에 착수하겠다는 방침이다. 복지부는 전날 보건의료 위기단계를 '경계'로 상향하고, 의협 집행부를 겨냥해 '집단행동 및 집단행동 교사 금지'를 명했다.
개원의 중심인 의협의 집단휴진이 불러올 파장이 예상보다 적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지만, 전공의 등 의료계 전반으로 집단행동이 확산될 가능성도 충분히 남아있다. 지난 2020년 정부의 의대 증원을 좌절시킨 '결정타'도 대학병원 등에서 수련 중인 전공의들의 파업이었다.
최근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수련병원 140여 곳의 전공의 1만여 명을 설문한 결과, 8할 이상(88.2%)이 단체행동 참여의사를 보였다고 밝힌 바 있다. 대전협은 오는 12일 온라인 임시 대의원총회에서 의대 증원 관련 대응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