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정은. 소속사 제공'파리의 연인' 강태영에서 '힘쎈 여자 강남순'의 황금주까지, 캔디 여주인공의 모범이었던 김정은이 괴력의 회사 대표 겸 히어로가 되기까지는 무려 19년의 세월이 걸렸다.
JTBC 토일드라마 '힘쎈 여자 강남순'(이하 '강남순')은 대대로 모계를 통해 괴력을 전승, 정의를 지키는 삼대 여성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과거 '힘쎈 여자 도봉순'이 로맨스 범죄물이었다면 이번 '강남순'은 강남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마약 범죄를 소탕하는 이야기가 큰 줄기다. 물론, 청춘 남녀의 로맨스도 있지만 삼대 모녀로 확장된 히어로 세계관이 비중있게 다뤄지면서 매력을 배가했다.
김정은은 타고난 장사꾼이자 강남 전당포 골드블루 대표, 누구나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강남 최고 현금 졸부 황금주 역을 맡았다. 황금주는 금권을 쥐고 있는 집안의 절대적 '가장'이자 넘치는 에너지만큼 넘치게 딸을 사랑하는 여자다. 평소엔 줏대 있게 자기 주장을 밀고 나가도, 딸 강남순을 위해서라면 나름 애틋한 모성애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 모성애에는 혹독한 시련을 겪은 여성 캐릭터가 할 법한 자기 연민이나 고통은 없다. 자식을 사랑하며 스스로를 해치는 일도 없다. 황금주는 탄생부터 (물리적) 강자였으며 사회적으로도 그렇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강남순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로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사랑이란 감정으로, 때로는 돈으로 전한다. 현실에서는 판타지이겠지만 그것이 황금주의 방식이다.
김정은에게 황금주란 이룰 수 없을 것 같았으나 끝내 이뤄낸 꿈이다. '파리의 연인' 성공 이후 '사랑스러움'이 역할이자 정체성 그 자체인 여성 캐릭터들만 쇄도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김정은은 끊임없이 스스로 우뚝 설 수 있는 캐릭터를 갈망했다. 자신의 욕심대로 되지 않아도 숨 죽이고 스스로를 북돋으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 '강남순'이란 기회가 '준비된 자' 김정은에게 왔고, 결국 그는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다음은 김정은과의 종영 인터뷰 일문일답.
배우 김정은. 소속사 제공Q 주인공 삼대 모녀 이야기가 잘 조화를 이뤘다. 드라마가 잘 되기도 했지만 괴력을 가진 CEO 황금주 역을 맡아 많이 즐기면서 찍었을 것 같은데A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서 시간을 보내다 작품을 하니까 눈에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소통하고 연기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를 굉장히 감사하면서 찍었다. 환경도 정말 좋아졌다. 저는 더 있고 싶은데 벌써 끝났다는 거다. (웃음) 괴력도 있고 돈도 많은 황금주가 모든 걸 '플렉스'(여유있는 소비)로 해결하는 것에서 너무 스트레스가 해소됐다. 캐릭터가 스토리를 이길 수 없고, 또 스토리가 현장에서의 사랑을 이길 순 없다는 생각도 했다. 김정식 감독(PD)님이 정말 배우를 너무 사랑하고 배려하는 분이다. 배우들이 외롭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게 혼자 고독하게 캐릭터를 돌파하니까 그러는데 이번엔 정말 저 혼자 한 게 없다.
Q 시청자들이 황금주의 시원한 '플렉스'에 열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사실 부와 정의는 공존하기 어려운 가치들이기도 한데
A 제가 예전에 '부자되세요'라는 멘트로 광고를 했을 때 사람들이 그걸 굉장히 천박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욕심을 대놓고 보여주는 게 천박하단 생각이었을 거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굉장히 듣고 싶은 말이었던 게 아닐까. 이 이야기도 그와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 남순이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금주가 은혜를 갚는 내 방식이라며 돈을 다 쓰고 다닌다. 그들의 도움이 우연이거나 정의가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금주를 기쁘게 했으니까 그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거다. 현 시대가 요구하는 정의가 이런 것 아닐지, 감히 생각을 해봤다. 과거에 가난하고 정의로운 역할을 많이 해봤던 사람으로서, 내가 정의롭기 위해 남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게 맞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위험한 부분도 있지만 그럴 바에는 황금주처럼 돈을 뿌리면서 모두가 행복해 하는 게 낫다.
Q 성별 고정관념이 반전된 캐릭터이기도 하다. 보통 '가장'하면 남편을 떠올리는데 황금주는 본인 스스로 '가장'을 자처하고 나선다. 이런 관계의 전복이 재미 포인트였던 것 같다A 힘이라는 게 저는 권력의 상징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요즘 지붕 뚫는 여자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여자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약자의 입장에 있다. (여자들이) 강압적으로 소외되거나, 희생되거나, 억압 당하거나 그런 것들을 비틀어버리는 설정이라 저도 연기하면서 통쾌했다. 집안의 '가장'이고 돈을 버니까 황금주가 오히려 가부장적이고, 소위 옛날 아버지상이다. 그러면 힘이 약한 남자들이 모여서 '저 독재자 또 시작이야' 이러면서 바라보고…. 그런 장면들이 백미경 작가 만이 쓸 수 있는 풍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끼리도 찍으면서 너무 웃기지 않느냐고 그랬다. 감독님이 수위 조절도 잘 해주셨다. 그 옛날 기억 속에 제가 했던 '파리의 연인' 캐릭터 때문에 더 차이가 크게 느껴져서 이득을 본 것도 있는 것 같다. '애기야 가자'에 끌려가던 사람이 이제는 끌고 가지 않나. (웃음)
JTBC 제공Q '파리의 연인'은 지금의 김정은을 있게 한 작품이기도 하고, 클래식한 신데릴라 스토리로 계속 회자된다. 물론, 이제 드라마에서 이런 여주인공을 찾아보긴 힘들긴 하다A 당시엔 사랑스럽다고 그랬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말도 안 된다. (웃음) 캔디형 여주인공인데 스스로 문제 해결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고 다니지 않나. 모든 문제를 남자 하나에 기대서, 박신양 선배가 한 번에 해결해준다. 그 후에도 저에게 이런 캐릭터를 자꾸 요구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그 때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정의로움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주인공의) 정의로움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 거다. 이건 도저히 못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나왔던 시간도 있었다. 그렇게 그 분기를 하나 넘은 것 같다. '파리의 연인'에서 제가 한번에 이렇게 바뀌었다고 보시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 배우가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잘 살아야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거고, 다행히 저는 그랬던 것 같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복귀했으며 시청자 반응은 뜨거웠다. 어쨌든 변신은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캐릭터에 갈증이 컸나
A '파리의 연인' 당시에는 그게(민폐성 캔디) 여성 캐릭터의 중요한 트렌드였다. 생각해보면 그만큼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그런 시대에 제가 편승해 함께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게 좋다. 혼자 도태되거나, 너무 외부에 있거나 하면 좀 슬플 것 같다. 이번에 저라는 배우가 완전히 다른 옷을 입고도 너무 좋아해 주시는 걸 봤다. 귀여운 건 절대 하고 싶지 않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웃음) 성숙한 카리스마에 너무 목 말라 있었다. 사랑스러움을 요구 받을 때는 내가 다른 존재감을 표현하기는 어렵나 그런 생각도 많이 했었다.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갈망은 사람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저도 욕망이 들끓었지만 스스로를 후회하게 만들거나 결핍이 있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강남순' 같은 작품을 만나니까 너무 행복했다. 좋은 드라마나, 좋은 여배우들의 연기를 봤을 때 심장이 끓어오르는 걸 보고 20~30대의 온도와 지금의 내 온도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배우 김정은. 소속사 제공Q 일상 속 마약 확산, 출연료 격차 등 최근 이슈가 된 사회 문제들이 전면에 나오기도 했다. 사전 제작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상황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말 잘 맞아 떨어졌다 A 생활 속에 마약이 침투하면서 복잡해지는 그런 메커니즘을 작가님이 미리 구상을 해서 취재를 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크게 사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코믹하게 접근하는 것에 대해 좀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까 괜찮더라. 작가님 미래에 다녀온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고, 주변에서는 지금 막 찍고 있는 줄 알았다. 저도 마약 관련해서 영상을 찾아보긴 했는데 지난해만 해도 이렇게 심각하진 않았다. 정말 남의 이야기라 '마약을 퇴치해 세상을 구하자'는 메시지가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봤다. 우리 드라마 이야기가 현실에 반영되는 걸 기뻐할 일만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섭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Q MZ 세대에 속하는 젊은 배우들과 작업한 소감이 궁금하다. 세 모녀 캐릭터 중에서도 딱 중간 연차의 배우였는데 후배들에게 조언도 좀 하고 그랬는지A 그 친구들의 표현 방식을 보는 게 쏠쏠한 재미였다. 나도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욕구가 있지만 나이가 있는 분들은 그 세월을 충분히 존중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20년 전에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후배들이 연기에서 어려운 부분은 감독님이 적극 도움을 주셨고, 저는 조언을 하는 게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편하게 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예전에는 현장에서 윽박지르는 연출자도 많았지만 그렇게 채찍을 휘둘러봤자 손해다. 연기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니까 여유가 있고, 집중이 잘되는 환경이어야 되는데 혼나면 뭐가 되겠나. 그런 면에서 감독님은 정말 똑똑하고 훌륭한 분이다. 누구 하나 촬영장에서 눈살 찌푸리는 사람이 없었다. 감사하게 결과가 좋으니까 서로 네가 더 잘했다며 우애가 돈독해지고 있다. (웃음)
Q 차기작 계획이 궁금하다. 앞으로도 다양한 모습의 김정은을 보고 싶어할 시청자들이 많을 텐데A '강남순' 배우들이나 제작진도 다 계획이 있는데 저만 지금 아무것도 없어서 문제다. (웃음) 대본만 들어오면 바로 할 건데 일단 아무도 안 주시고 있다. 이런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조금만 더 누리고 싶다. 들어오는 게 있다면 놓치지 않을 거다. 감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차기작을 하고 싶다. 사실 배우가 아무리 뭘 한다고 해도 대중이 인정하지 않고, 찾아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씁쓸하지만 무관심만큼 슬픈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다음 기대가 있다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는 것 같다. 정말 다음을 향해 나아가고 싶고, 감히 할리우드 같은 데서 좋은 기회가 오면 해보고 싶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