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제공※ 스포일러 주의 영화 '빅슬립'의 시작과 끝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영화적으로는 '배려'와 '위로', 연출적으로는 감독의 '진정성'이다.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에서 늘 어둡게 그려지는 길 위의 아이들을 감독은 '빛'으로 표현하며 영화를 연다. 시작부터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선입견을 사려 깊으면서도 서정적인 방식으로 깨트리려 한다.
그렇게 시작한 영화는 내내 섬세함과 배려를 잃지 않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가장 영화적이면서도 가장 감독다운 방식으로 위로를 전한다. 어설픈 용기나 격려보다는 그저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것, '빅슬립' 안에서는 기영(김영성)과 길호(최준우)가 그토록 바랐던 '단잠'을 선사하며 마무리한다. 흔히 말하는 '진정성'이란 단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이지만 그렇기에 제대로 보지 않고 지나치기 쉬웠던 순간들과 사람들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다. '빅슬립' 역시 당연하게 여기고, 당연하게 지나쳐 온 삶들을 사회가 덧씌운 선입견 위로 끌어 올린다. 김태훈 감독이 끌어 올리고 또 가고자 하는 영화의 길 역시 여기에 있다. 그 시작점이 된 '빅슬립'과 감독으로서의 고민 그리고 앞으로의 길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영화 '빅슬립' 스틸컷. 찬란 제공 빛나는 아이들을 위한 단잠
▷ 영화 초반, 랜턴을 머리에 쓰거나 든 아이들을 마주 보는 카메라를 통해 아이들 자체가 빛무리처럼 환하게 빛나는 듯한 느낌도 들고, 이후로는 랜턴 불빛이 자신들을 봐달라는 신호로도 읽혔다. 또 때때로 카메라나 관객이 아닌 아이들이 카메라 혹은 우리를 응시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과 랜턴에 관한 연출 의도가 궁금하다. 한때 이태원 언덕배기에 테이블 하나 펼쳐놓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붙잡고 수업한 적이 있었다. 그때 '라이트 페인팅'이란 수업을 했다. 랜턴 빛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걸 내가 카메라 장노출을 이용해서 찍으면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형상화되는 작업이다. 그걸 하며 느낀 게, 처음 구상은 내가 빛을 들고 가서 어둠 속 아이들에게 빛을 비춘다는 거였다.
근데 완전 반대가 됐다. 어둠 속 아이들이 빛이 되어 날 비추는, 그런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마치 그게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 같았다. 아이들이 영화가 되어서 날 위로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빅슬립'을 쓰면서 아이들을 어둠으로 묘사하지 말고 빛으로 묘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호'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길호가 아이들과 헤어지고 뒤돌아서서 오고 난 후 그 뒤에 불빛들이 보인다. 사실 길호는 거길 떠나지만 어둠 속에서 불빛들이 '나 여기 있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으로 표현한 거다.
영화 '빅슬립' 티저 포스터. 찬란 제공 ▷ 영화에는 제목처럼 잠잘 곳을 찾아 헤매는 아이들이 잠을 자는 모습을 포착한 장면이 많다. 아이들이 그저 잠을 잔 거 밖에 없다고 외치는 것처럼 그들의 무해함을 좀 더 부각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여러모로 잠을 자는 장면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다. '빅슬립'은 내 수업 중 잠만 자는 학생의 모습에서 출발했다. 자고 싶은데 잘 수 없거나 먹고 싶은데 먹을 수 있는 아이들이 과연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뭔가 어른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잠이라는 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어떤 모습이든 누군가가 자는 모습은 편안하게 느낄 거라 믿었다. 그 아이들은 그게 필요하다는 걸 이야기해 주고 싶었고, 그래서 영화가 아니라 아이들의 잠이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 지금의 엔딩이 어떤 점에서 기영과 길호의 이야기를 가장 잘 정리할 수 있다고 봤나? '빅슬립'은 무조건 잠든 사람의 모습으로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썼다. 이 영화의 시작이자 모티프가 됐던 수업이 굉장히 큰 역할을 했는데, 술에 취한 아버지 때문에 잠을 못 잤던 아이에게 필요한 게 내 수업일까 생각했을 때 어설픈 내 수업이나 설교보다는 자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봤다. 끝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영화조차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다. 그냥 멈추고, 더 이상 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말고 빨리 재우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화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제공 평범한 사람들의 빛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길
▷ 혹시 이번에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 혹은 가장 많이 고민하게 만들었던 부분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타인의 고통을 섣불리 재해석하고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들과 오랜 시간 수업하면서 나 자신은 물론 영화적인 이야기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아이들과 영화를 찍을 때는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또 직접 연기하게 된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만들 때보다 훨씬 더 이야기를 돌아보게 되더라.
내 영화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은 오로지 나 스스로를, 나를 향한 영화였다면 아이들과 영화를 만들면서 나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이걸 만든 사람에게도 영화가 될 수 있는 영화이길 바라게 됐다. 스태프든, 배우든, 같이 한 모든 사람에게도 영화이고 싶고, 이들도 영화를 통해서 위로받으면 받았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 첫 연출작을 마무리하고 나서 얻은 성취감은 무엇이었는지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다. 진짜. '빅슬립'을 만드는 게 마냥 행복한 순간만은 아니었다. 굉장히 고립된 시간이 오래 있다 보니 나 자신도 작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갔었는데, 관객분들을 만나면서 정말 용기를 많이 얻었다. 앞으로 또 해보고 싶다는 용기를 가지게 만들어 주는 거 같다. 그래서 앞으로 있을 GV(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진심으로 관객분들을 만날 생각이다. 최선을 다해 만나보려고 한다.
영화 '빅슬립' 스틸컷. 찬란 제공 ▷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감독으로서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가?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거 같다. 아주 소박한 이야기,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끌린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빛나는 순간, 인간애라고 하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포착하고 담을 수만 있다면 그게 영화가 될 거라고 믿고 있다.
▷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쉬워 보이지만, 사실 제일 어려운 이야기다. 그래서 이제 허구적인 이야기도 공부하고 있다. 이렇게 가면 너무 힘들 거 같아서….(웃음) 열심히 노력하려고 한다.
▷ 이제 본격적으로 감독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상황이다. 앞으로 감독의 길을 걸으며 놓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신념이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 10년 전 인디포럼에서 한 '명희'라는 영화 GV에서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때 등장인물들의 빛나는 순간을 끝까지 담아내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그게 계속 나한테는 태도로서 다가오는 거 같다. 물론 비극적인 이야기도 다룰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인물들을 소비하지 않고,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최대한 최선을 다해서 그들의 빛나는 순간들을 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영화 '빅슬립' 스틸컷. 찬란 제공 ▷ '빅슬립'을 볼 예비 관객을 위해 마케터가 됐다고 가정해 보고, 우리 영화는 이런 영화라고 간략하게 홍보해 보자. 시놉시스만 보면 굉장히 무거운 영화라고 오해하실 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충분히 부담감을 내려놓고 즐길 수 있을 만한 영화예요. 영화를 보시고 나면 다양한 생각들에 빠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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