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소리. 씨제스 스튜디오 제공배우 문소리에게 2024년은 남다른 한 해였다. 열심히 하던 대로 연극 무대에 섰고, 그 와중에 tvN 드라마 '정년이'와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시즌2로 대중과 만났다. 물론 두 작품에서 문소리는 180도 달랐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답게, '정년이'의 문소리는 정년이에게 천부적인 소리 재능을 물려줬지만 한 많은 삶을 살았던 엄마 서용례이자 소리꾼 채공선으로 변신했다. '떡목'이 된 정년이를 위해 '추월만정' 한 가락을 뽑아 낸 문소리의 모습은 온갖 고생을 겪었지만 꿋꿋이 시대를 살아낸 여성 그 자체였다. 특별출연이었음에도 뜨거운 관심이 쏟아진 이유다.
"마음껏 늙어보자는 생각이었죠. 촬영은 올해 3월에 끝났고, '추월만정' 녹음까지 4월에 끝났어요. 그러고 나서 저를 봤는데 너무 나이가 든 느낌이고, 사람이 쭈그러든 거 같았어요. 다행히 연극 공연을 다니면서 얼굴은 좋아졌어요. 원래 공연은 루틴이잖아요. 오전에 병원 다니면 오후에 연습하러 가거나 공연을 하니까요. 그렇게 몇 달을 지냈더니 체중도 빠지고 저한테 좋은 시기에 도움이 된 거 같아요. 공연에 온 관객이 '정년이 엄마 왜 이렇게 젊냐'고 하길래, '원래 안 늙었어요'라고 생각했죠." (웃음)
'추월만정' 그 한 장면을 위해 1년 정도의 연습 기간도 부족했다. 문소리와 판소리의 인연은 30년 가량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20대 초반, 연극에 뛰어들고자 했으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다니던 대학에 그대로 복학했다. 그렇게 종로 일대를 헤매다가 판소리 명창 고(故) 남해성 선생을 만났다. 자신을 보자마자 '춘향이가 왔다'며 좋아한 남 선생에게 이끌려 문소리는 무려 1년 반 동안 수궁가를 배웠다. 지금 돌아보면 눈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남 선생은 언제나 문소리를 따뜻하게 반겼다. 문소리로부터 구성진 '추월만정'의 가락이 그냥 나온 건 아닌 셈이다.
"'추월만정'은 느린 장단이라 첫 소절부터 소리 공력이 그대로 드러나거든요. 실력이 있어야만 불러낼 수 있는데, 사실 1년 연습도 부족하죠. 20대 초반에 하염없이 종로를 헤매다가 남해성 선생님을 만났고, 소리를 하고 싶느냐고 물으셔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산 공부까지 따라갔었죠. 큰 집에서 밥을 해 먹으면서 제자들이 전부 모여 하루 종일 노래만 해요. 물가에서 노래하고, 방에서 노래하고…. 그렇게 1년 반을 배우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멀어졌어요. 제가 참 싸가지 없게 연락도 못 드리고 연극하고 있을 때, 제 분장실로 선생님이 과일 바구니를 갖고 오셨어요. 보고 싶었다고….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오아시스' 개봉했을 때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시곤 '쟤가 저렇지 않다'라며 막 우셨대요. 그렇게 절 예뻐해 주셨어요. 코로나 시기에 돌아가셔서 빈소에도 못 가보고 너무 마음에 맺혔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선생님 생각을 많이 했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걸 담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죠. 소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작품이잖아요."
배우 문소리. 씨제스 스튜디오 제공주인공 정년이 역 김태리와의 인연 역시 출연을 마음 먹게 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이미 모녀 호흡을 맞췄던 두 사람은 여전히 끈끈한 친분을 자랑한다. 10화를 보면서 함께 술을 마시며 조촐한 파티도 가졌다.
"제주도에 있을 때 태리가 우리 집에 놀러왔는데 '정년이' 준비하고 있다고 했어요. 요즘 소리 레슨 받는데 쉽지 않으니까 구경을 오래요. 그래서 놀러 간 적도 있고, 태리가 노렸죠. (웃음) 나중에 엄마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인연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정년이(김태리)와 정자(오경화), 목포 사투리 선생님까지 저희 집에 놀러 와서 같이 10화를 봤어요. 선생님 어머니께서 목포 홍어를 보내주셔서 해남 막걸리랑 같이 마시면서 드라마를 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심지어 어제 작은 케이크를 놔두고 시청률에 맞춰서 초를 몇 개를 켤 것인지 분분했거든요. 결국 15개를 꽂은 다음에 노래 부르고, 불 끄고 기도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최고 시청률 15%는 넘겼더라고요. 그래서 단톡방에 소원이 이뤄졌다고 기뻐했어요. 별 거 아닌데 서로를 위해줄 수 있는 관계가 유지되고, 응원하는 사이가 되는 게 너무 좋아요."
김태리와 또 다시 모녀로 만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서도 양 어깨에 책임감을 얹고, 극을 이끌어 나간 김태리에게 배우 대 배우로 존경을 표했다.
"태리가 떼쓰면 제가 거절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걔도 생각이 있지 않을까요? (웃음)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요. 태리처럼 그렇게 노력하는 배우는 오랜만에 본 거 같아요. 큰 짐을 지고 가는데도, 본인이 너무 힘든 게 눈에 보이는데도 씩씩하게 팀을 잘 이끌어 줬거든요. '네가 후배지만 존경스럽고 대단하다'고 그랬어요."
또 하나의 특별출연작인 '지옥' 시즌2에서는 정치인 빌런 이수경이 됐다. 채공선이 감정적으로 '정년이의 매달릴 구석'이었다면, 이수경은 큰 그림을 그리며 모두를 지배하는 '흑막'이자 위선적인 정치인이었다. 전혀 상반된 색깔의 두 캐릭터를 문소리는 이렇게 해석했다.
"'지옥' 시즌2의 빌런을 리얼하게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판타지의 세계로 접근할 것인지 고민이 됐어요. 작품 전체에서 내가 해야 할 미션이 무엇인지 봤죠. 이 판 안에 내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결론적으로는 판 밑에 다 깔려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세계관 밑에 물 흐르듯이 은은하게 깔려 있고, 컨트롤러를 쥐고 있어야 해요. 인물의 활약보다 '말'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게 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걸로 시작해서 하나씩 만들어졌던 거 같아요. 연상호 감독님과 대화하다가 그렇게 잡아 나간 거고요. 채공선·서용례와 이수경을 도출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어요."
배우 문소리. 씨제스 스튜디오 제공TV 드라마에 OTT 시리즈, 그리고 연극까지. 공개된 작품들의 시기가 절묘하게 겹치면서 '다작'하는 배우가 됐지만 문소리에게는 늘 해왔던 일의 연장선상이다. 그 중에서도 연극은 언제나 특별한 원동력을 문소리에게 선사한다. 배우로서 시작했던 지점이자,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도 끝내 걸었던 길. 그래서 문소리에게 연극은 고향과도 같다.
"비슷한 시기에 작품들이 공개되어서 효과가 배가 된 거 같아요. 저에겐 20년 넘게 해왔던 일의 연속이지만요. 그래도 한 작품, 한 작품 고민한 시간들이 좋은 평가를 받아서 요즘 말로 '럭키 비키' 아닐까요? (웃음) 연극 무대를 서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요. 서로 소통을 안 하면 작품이 힘을 갖기 어려우니까 더 깊게 관계를 쌓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 사이에서 얻어지는 따뜻함이 있어요. 일종의 사랑을 나누는 거죠. 살다 보면 별거 아닌 일로 웃을 때가 없는데 연극에서는 그런 순간이 와요. 그게 너무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스스로 연기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고민과 질문을 또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과정들이 재미있고 좋았어요."
그 말처럼 문소리는 질문을 아끼지 않는 배우다. 그의 연기 또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대본에 쓰인 정답이나 왕도를 찾기 보다 수많은 질문을 생각해본다. 그 질문의 답을 찾고, 연결 시키고, 맞닿는 지점을 찾는다. 연결이 되지 않는 질문들은 중간 중간 버린다. 그렇게 캐릭터를 구축해 나가면서 머릿속은 온통 작품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작품이 끝나면 금방 빠져나와 평범하게 집밥을 걱정하는 1인으로 돌아간다.
"질문을 많이 찾아내는 게 제 능력 같아요. 사실 질문이 생기지 않는 작품보다 더 힘든 건, 질문하지 말라는 연출자 같아요. '그냥 하시죠'라고 할 땐 당연히 사정이 있을 거예요. 물론 저도 사정을 보고 하긴 하는데 질문 자체를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당장 답을 달라는 게 아니라 연출자의 세계관을 알아야 나도 확신을 갖고 임할 수 있으니 질문을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당장 정답을 내리지 못하면 질문을 꺼리게 되거나, 본인도 부담스러운가 봐요. 물론, 연상호 감독님은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를 해도 너무 재밌어요. 대화의 텐션이 떨어지지 않아요." (웃음)
배우 문소리. 씨제스 스튜디오 제공자기 주관이 강할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작품 선택에 있어서는 그렇지도 않다. 김태리의 부탁으로 '정년이'에 합류한 것처럼 수익보다는 '사람'을 보면서 작품을 선택하거나 고심하기도 한다. '인생의 재미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는 게 문소리의 지론이다.
"은근히 거절을 잘 못해요. 사실 절 너무 간절하게 쓰고 싶다면 제가 뭐라고 그걸 거절하겠나 싶기도 하고요. '이 돈으로 해도 되겠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생의 재미를 돈으로 따질 수가 없거든요. 돈 많이 받고 마음이 힘든 게 더 지옥인 거고, '돈을 얼마 받았다' 이런 걸 생각하지는 않아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짜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어요. 깊은 밤에 하늘의 별이 가득히 떨어지는 순간, 이걸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잖아요. 그걸 생각하지 않아야 멋진 순간이 와요. 가성비를 선택하면 늘 예상한만큼의 결과인 거 같고요."
내년에도 문소리는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로 시청자들과 만난다. 남편 장준환 감독의 작품에 출연할 지는 미정이지만, 오히려 한가하니까 할 일들이 많다.
"좋은 배우들과 같이 하는 작품은 거절할 이유가 없죠. 집에 계신 분(장준환 감독)은 아직 출항하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웃음) 요즘 만들어지는 영화 편수가 너무 없어서요. 그리고 저는 텐트폴(핵심 상업영화)에 많이 불러주지 않으니까 의외로 한가해요. (웃음) 그런데 시간이 좀 생기면 언제 바빠질 지 모르니까, 밀렸던 공부도 하고 딸에게 집중하면 좋은 작품이 또 오지 않을까요.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기다려 보고, 어디든 얼굴을 비추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