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주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참사 후 1년…이태원과 日 아카시는 어떻게 달랐나 (계속) |
그해는 2001년이었다. 일본이었다. 11명이 숨졌고, 247명이 다쳤다. 20년이 넘게 흘렀다. 이번에는 2022년, 한국이었다. 159명이 죽고, 320명이 다쳤다.
시간도, 장소도, 피해의 규모도 모두 달랐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이 죽었다'는 진실. 두 나라는 이 공통된 아픔을 공유한다.
하지만 상흔을 극복하는 과정은 같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 발생 1주기가 다 되도록 여전히 공전(空轉)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아카시 참사 후의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뭉쳤고, 직면했고, 바꿨다. 참사 후 1년을 우리는 어떻게 보냈는지, 일본의 1년을 통해 돌아본다.
그들은 뭉쳤다 : 참사 열흘 만에 꾸린 '조사위원회'
2001년 7월 21일, 일본 효고현에 있는 아카시시(市)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불꽃축제를 보러 온 시민 약 6500여 명이 운집한 육교에서 벌어진 압사사고로 11명이 숨졌다.
참사 이후 일본은 빠르게 뭉쳤다. 사고 열흘 여 만인 8월 2일, 시청 주도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기 위한 '아카시 불꽃축제 사고조사위원회'(조사위)가 꾸려졌다.
당시 위원회는 "당사자(축제 주최자)인 아카시시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인 외부 전문가에게 엄정한 조사를 부탁함으로써, 과학적이고 신뢰가 있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해당 위원회를 발족시켰다"고 출범 의의를 밝혔다.
전(前) 오사카 고등법원장인 하라다 나오 변호사가 위원장을 맡았고, 재해, 건축 공학, 도시 방재 관련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위원들이 모였다. 외부의 개입을 받지 않도록 '제3자 조사기관'으로 출범해 심의를 시작했다. 그렇게 진상 규명이 빠르게 시작됐다.
반면 우리나라는 참사 직후 뭉치는 대신 흩어졌다. 여야는 각자도생을 택했다. 야당은 참사 다음날인 지난해 10월 30일 '이태원 참사 대책본부'를, 여당은 11월 7일 '이태원 사고조사 및 안전대책 특별위원회'를 각각 따로 꾸렸다. 여당이 제안한 참사 관련 여야정 협의체는 야당의 거부로 무산됐다.
그후, 참사 1주기를 앞둔 지금까지도 여전히 독립적인 조사 기구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지난 4월 20일에는 야당의 주도로 이태원 참사 관련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릴 수 있도록 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발의됐지만, 여당은 "국회의 입법 기능을 이런 식으로 오남용하는 것은 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재난 정쟁화를 중단하라"고 비판할 뿐이었다.
참사 직후 유가족들이 뭉치는 과정조차 순탄치 않았다. 정부와 서울시가 참사 유족 사이에 연락처를 공유하지 못하도록 '개인정보 보호지침'을 세우는 등 유족 간 소통을 방해하면서, 참사가 발생한지 42일 만인 12월 10일에서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회'가 출범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직면했다 : 참사 6개월 만에 나온 '사고조사보고서'
빠르게 조사위를 꾸린 일본은 참사를 '직면'했다. 2001년 8월 2일 조사위가 꾸려진 첫날부터 회의를 시작해 참사 당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참사 원인을 규명하기 시작했다.
조사위는 아카시시에 자료와 정보를 전부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경찰에도 당시 경비계획서를 비롯한 각종 자료 제출을 의뢰했다. 시민들에게도 참사와 관련한 정보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해, 당시 영상 등을 시민으로부터 제출 받아 상황을 파악하기도 했다. 또한 현장에 있던 유족, 경비회사 관계자, 아카시 시청 관계자, 소방 관계자들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그렇게 15회의 회의와 무수한 조사를 거쳐 2002년 1월 30일, '사고조사 보고서'가 완성됐다. 보고서만 142쪽, 첨부된 관련 자료는 259쪽이었다.
보고서는 제1편 '사고 원인', 제2편 '기술해석', 제3편 '재발방지'로 나뉘었다. 특히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을 기술적인 분석에 공을 들였다. 조사위는 사고 직후에 육교로 유입, 유출된 시민의 숫자, 군중의 보행 속도, 육교의 구조를 비교해 당시 혼잡 상태와 군중 밀집도를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게 계산했다.
그 결과 1제곱미터(㎡)당 13~16명이 있을 경우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산정했다. 그리고 사고 당시인 오후 8시 50분에서 55분쯤 1㎡당 13~14명이 육교에 있었고, 한 사람당 약 400~540kg의 압력이 가해져 압사사고가 발생했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참사 이후 군중밀집도와 관련한 수사 결과가 나왔지만, 일본처럼 상세히 보고서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일본 '아카시 불꽃축제 사고 조사 보고서' 중 일부 발췌그리고 그 상황을 초래한 범인은 '군중들을 나눠서 입장시키는 등 군중을 규제할 수 있는 유효한 조치를 하지 않고, 별다른 제한 없이 육교에 군중을 유입시킨' 주최자(시청) 측과 경찰, 경비회사라는 사실을 142쪽에 걸친 공식 보고서를 통해 증명했다.
특히 참사 발생 직전에 압사 우려에 대한 신고가 수차례 있었을 뿐 아니라 기동대 등 추가인력 요청이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경찰의 책임을 짚었다.
조사위는 이를 토대로 재발방지 대책을 제안했다. 현장에서의 지휘, 명령 계통을 일원화하는 등 경찰의 혼잡경비 대책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경비 업무를 담당하는 이에게 공공장소에서 법적 지시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경비업법의 문제를 지적하며 대책 마련을 제언했다.
사고조사보고서 덕분에 책임 소재는 분명해졌다. 이후 보고서는 재판의 증거로 활용돼 경찰관과 경비회사 책임자 등이 이후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책임자들은 참사 이후 진상 규명 대신 '진실 은폐'에 급급했다. 참사 일주일째인 지난해 11월 5일에는 참사 발생 전 경찰이 '핼러윈 기간 많은 인파로 인한 사고가 우려된다'는 내용으로 작성된 정보 보고서들을 삭제한 의혹이 제기됐다.
경찰 등의 허위 보고 정황도 드러났다. 당시 관할 서장인 이임재 전 용상경찰서장이 작성한 당일 상황보고서에는 이 전 서장의 현장 도착 시간이 참사 발생 5분 뒤인 오후 10시 20분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오후 11시 5분에 도착한 것으로 밝혀졌다.
박희영 용산구청장 또한 구청의 부적절한 대응을 은폐하기 위해 구청 직원을 이용해 사고 현장 도착 시간, 구청의 재난 대응 내용 등에 관한 허위공문서를 작성하고 배포한 사실이 드러났다.
책임자들은 '책임 면피'에도 바빴다. 참사 다음 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코로나19가 풀리는 상황이 있었지만 파악하기로는 예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었다"며 "경찰,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논란을 낳았다.
박 구청장 또한 참사 이틀 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희는 (핼러윈 대비) 전략적인 준비를 다 해왔다.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며 "이건 축제가 아니다. 축제면 행사의 내용이나 주최 측이 있는데 내용도 없고 그냥 핼러윈에 모이는 일종의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고 봐야 된다"고 말해 지탄을 받았다.
오세훈 서울특별시장 또한 지난해 11월 18일 "아시다시피 올해 1월부터 중대재해법이 시행되지 않았냐. 그래서 온 사회가 모든 지자체, 정부, 기업 할 것 없이 중대재해에 모두 초점이 옮겨갔다"면서 "그래서 서울시도 거기에 즉응해서 중대재해예방과를 만들면서 인원 조정을 했던 거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태원 참사 같은) 사회적 재난에 대해서 신경 쓸 여력이, 에너지가 분산이 됐던 것"이라며 참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덜어내려 했다.
그들은 바꿨다 : 참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참사 대응을 위해 뭉치고(조사위 구성), 참사를 직면한(조사보고서 발간) 일본은 결국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법과 제도를 바꿨다.
2002년 12월 일본 효고현 경찰서는 '혼잡경비' 지침서를 발간했다. 당시 혼잡경비와 관련해 명확한 법령이 없었기에, '혼잡경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부터 시작해 주요 규제방법을 명시했다.
일본 효고현경찰서가 발간한 '혼잡 경비' 지침서 발췌해당 매뉴얼 덕분에 '혼잡경비' 기능이 경찰 내부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져 2005년 11월에는 경비업법과 국가공안위원회 규칙까지 개정됐다. 원래 상주경비와 교통유도경비만 있던 '경비 업무검정'에 '혼잡경비' 업무검정까지 신설된 것이다.
참사 1주년, 우리나라는 어디까지 왔을까.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 6월 30일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돼 지난 8월 3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3개월 넘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발의된 관련 법안(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 등) 수십 개 또한 국회에 아직 계류 중이다.
10·29 이태원참사 태스크포스(TF) 소속의 이창민 변호사는 "일본 아카시 참사에 비하면 우리나라 이태원 참사의 경우 도의적, 정치적,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책임자들이 많기 때문에 곧바로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지지 않은 것"이라면서 "단지 아주 국소적이게 형사 책임만을 문제 삼고 거기에 매몰돼있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하루빨리 제대로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져서 많은 권한을 가지고 제대로 조사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한 아카시 참사 유가족 시모무라 세이지씨는 말했다. "유가족들이 납득할 수 있는 사고 보고서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 우리 아이가 죽어야 했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