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연합뉴스손 쓸 수 없는 폭우, 경로를 벗어난 태풍, 길어지는 가뭄…. '지구에서 살아가기' 난이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인간활동으로 지구는 예정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고 늘어나는 생존비용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점점 커질 불평등은 기후변화가 곧 인권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가장 많이 온실가스를 배출해온 주체에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고 규제하지 않는다면, 기후변화를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기후소송, 이제 기업에게 '진짜 책임' 묻기 시작
글로벌 에너지 기업인 엑손모빌과 쉘, 쉐브론, BP, 코노코필립스, 미국석유협회(API) 등은 지난달 15일 대규모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소송을 제기한 주체는 환경단체도 특정 지역주민 등도 아닌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였다.
캘리포니아는 지난해 12월 1000년 만의 최악의 가뭄을 겪은 데 이어 올해 1~3월엔 폭우로 인해 파자로 밸리 대부분이 잠기는 홍수를 경험했다. 지난 7월 말엔 모하비 국립보호구역 요크산불로 서울 면적의 절반가량이 불탔다.
연합뉴스캘리포니아주는 이 사태의 책임을 석유재벌 기업 등 화석연료 산업계가 나눠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주정부는 기업들이 1950년대 초부터 화석연료 산업이 지구 온난화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을 알고도 사실을 은폐했고, 이에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늦어지면서 수백억 달러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기업들이 탄소배출을 저감하겠다고 홍보했지만 감축 규모는 턱없이 부족했고, 대체연료에 대한 투자 규모는 부풀려 과장했다는 내용도 소장에 포함됐다.
정부가 기업을 상대로 기후변화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에서만 7개 주와 지자체 수십 곳이 석유회사를 상대로 비슷한 소송을 낸 상황이다.
과거 기후변화 소송이 환경단체나 시민 등의 주도로 특정 환경 파괴 피해 등에 대한 사후적 책임을 묻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가장 큰 원인 제공자 중 하나인 기업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해낼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기업이 기후관련 정보나 대응을 보다 책임 있게 수행할 것을 요구하는 '기후워싱(Climate Washing)' 소송이 최근 크게 늘었다. 기업이 기후관련 리스크를 공개하지 않거나 불확실하고 모호한 용어로 호도하는 행위, 기후대응에 대한 투자·지원을 과장하는 행위 등이 미친 손해를 따져 묻는 것이다.
영국 런던정경대(LSE) 산하 그랜섬 기후변화환경연구소가 지난달 6월 발표한 '기후소송 글로벌 트렌드 2023'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워싱 소송은 2021년에 27건, 지난해엔 26건 제기됐다. 2015년 이후 지난해까지 제기된 총 기후워싱 소송이 총 81건인 점을 고려하면 절반 이상이 지난 2년 사이 이뤄졌다.
CSR·ESG만으로는 부족…공급망 실사 현실화
연합뉴스이같은 소송의 증가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CSR)을 인정하며 기부에 나서고, 비재무적 영역의 정보를 공시(ESG)하는 것만으로는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해당 기업의 사업영역은 물론이고 직·간접 공급업체까지 전 영역에 걸친 영향력만큼의 대응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현재 유럽연합(EU)에서는 '지속가능한 기업 공급망 실사 지침'(이하 EU 공급망 실사법)의 입법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 되고 있다. 법이 시행될 경우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은 자체 사업영역뿐 아니라 자회사와 직·간접 공급자, 하도급자 등 유의미한 비즈니스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공급자를 대상으로 인권과 환경에서의 부정적 영향 등을 의무적으로 실사하고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위반 시 금전적·행정적 제재도 명시하고 있다.
적용을 받게 될 EU 역내 기업은 대기업(고용인 500명·순매출 1.5억유로 초과)의 경우 9400개, 중견기업(고용인 251~500명·순매출 4천만~1.5억유로 등) 3400개 수준이다. 이들 기업과 직·간접 공급 관계에 있는 우리 기업들이 실사에서 낙제점을 받는다면 더 이상 거래를 유지하기 어렵다.
지난달엔 국내에서도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인권환경보호에 관한 법률'이 발의됐다. EU 공급망 실사법과 유사하게 상시근로자 500명 이상, 매출액 2000억원 이상 대기업을 대상으로 인권환경실사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이다. 요건을 충족하는 기업들은 인권·환경 정책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공급망 내 기업에 대한 모니터링과 공시 등을 진행해야 한다. 공급망은 기업의 원자재 획득부터 최종 소비까지 모든 단계에서 직·간접적으로 형성하는 관계로 규정했다.
기업뿐 아니라 투자자 책임도 중요
제품이나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업뿐 아니라 이들 기업에 투자하는 주체에 대한 책임 추궁도 강해지고 있다.
화석연료 기업들의 자금을 추적하는 독일 환경단체 우르게발트(Urgewald)는 세계은행이 지난 한 해 동안 석유와 가스개발 목적의 무역금융에 약 37억달러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관련 보고서에서 우르게발트 측은 "세계은행은 보다 투명한 거래를 해야 하며 화석연료에 대한 자금지원은 배제해야 한다. 이같은 행위는 파리기후변화협약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국내 금융기관도 시험대에 올랐다. 우르게발트와 그린피스 인터내셔널을 비롯해 기후솔루션, 한국사회투자포럼(KoSIF) 등 국내외 28개 기후환경단체는 삼성화재에 '석탄 발전회사에 대한 운영 보험 제공을 즉시 중단하라'고 공개서한을 보냈다.
삼성그룹 계열의 금융보험사는 RE100(기업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쓴다는 자발적 국제 협약)에 가입하고 석탄발전소에 대한 신규 보험인수를 중단하는 등의 대응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존 석탄발전소에 대한 보험은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지원 축소나 철회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솔루션 기후금융팀의 엘레오노라 파산(Eleonora Fasan) 연구원은 "기후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삼성화재와 삼성생명은 다른 글로벌 보험사들보다 뒤처져 있다"며 "석탄발전소에 대한 운영 보험을 제한하고 기존 석탄 관련 보험 인수 갱신을 빠르게 종료하지 않는다면 그린워싱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