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정미희 역 배우 박지아. 박지아 제공※ 스포일러 주의 "몇 번을 말해? 핏줄이 그렇게 쉽게 안 끊어져요. 동사무소 가서 서류 한 장 떼면 너 어디 있는지 다 나와. 어디 또 숨어봐. 내가 찾나, 못 찾나." _'더 글로리' 12화 중 정미희의 대사 '핏줄'이란 이유로 문동은(송혜교)과 그의 엄마 정미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였다. 미희가 동은을 향해 한 말은 저주처럼 동은을 옭아맸다. 동은은 엄마 미희에게서 견딜 수 없는 밑바닥을 봤고, 자신을 버린 엄마에게 '핏줄'로 할 수 있는 최고의 벌을 내린다.
동은 엄마 미희가 나올 때마다 시청자들은 '찐 광기' '분노유발자' 등의 수식어를 소환한 것은 물론 "빡친다"('화나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는 말로 동은 대신 분노를 표출했다. 그만큼 정미희는 동은의 가장 첫 번째 가해자이자 최고의 가해자였다. 동은을 응원하는 모든 시청자가 정미희를 보며 울화가 치밀 수 있었던 건 배우 박지아 덕분이다.
박지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펼친 대본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의 정미희를 마주했다. 대본 속 대사와 지문, 자신만의 서브 텍스트(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맥락)를 찾아내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정미희를 구축해갔다. 근 9개월에 이르는 공백 기간에도 정미희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7㎏ 감량한 몸을 독하게 유지했다.
그렇게 완성된 게 우리가 본 '정미희'다. 스스로도 독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지만, 박지아는 행복했다. 지난 3일 서울 양천구 목동 CBS노컷뉴스 사옥에서 만난 박지아에게서 정미희를 연기하며 어떤 행복들을 만났는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박지아가 정미희를 만나 지독하게 만들어가기까지
▷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 엄마 정미희 역으로 열연을 선보였다. 이에 대해 극찬하는 시청자도 많았다. 요즘 인기를 실감하나? 길을 다니면 예전에는 아는 척을 소심하게 하셨다. "누군가 봐"라며 소근소근하고 가셨는데, 요즘은 과감하게 들이대신다.(웃음) 잘 봤다고 하시고, 사진도 찍어달라고 하신다. ▷ '더 글로리'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대체로 김은숙 작가님 작품 들어간다고 하면 배우들 사이에서 술렁술렁한다. 난 거기 속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나와 연이 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술렁술렁하기에 다른 때처럼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감독님 미팅이 잡혔다. 오디션을 보겠거니 하고 갔는데, 감독님이 나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이후 대본을 받아 가서 분석하라고 하시더라. 연기하면서 같이 하게 될 거라 생각도 못 했던 분들인데, '와,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구나' 싶었다. ▷ 김은숙 작가가 안길호 감독에게 박지아를 추천했다고 들었다. 혹시 촬영 전후로 김은숙 작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작가님이 언뜻 이야기하시기로 내가 나온 작품을 다 봤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왜 그걸 다 보셨냐고 그랬다. 추천해드리고 싶은 것도 있지만 사실 얼굴이 빨개지고 나만 아는 비밀 같은 게 있는데….(웃음)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 처음 대본을 읽고 난 후 생각한 정미희는 어떤 인물이었나? 그리고 연기해 나가면서 더 깊게 들여다본 정미희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배역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미팅 끝나고 대본을 꼭 안고 와서 첫 장을 펼치는데 너무 설레더라. 도대체 동은 엄마 정미희는 어떤 사람일까 설레면서 대본을 펼쳤다. 일단 내가 나오기 전 상황부터 대본을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쓸 수 있지?'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 본 정미희는 이발소에서 일하는 아줌마인 듯 아가씨인 듯 한 어떤 여자로 나오더라. '어? 매력적인데?' 몇 장 더 넘기니 딸을 팔아먹더라. 한 가정의 엄마 역할 그쯤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넘어가겠구나 싶었다. 무게감이 내게 드리워지면 어쩌나 하면서 읽어나갔다. 이후 18년이 지난 다음 재등장하는데,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변화를 갖는 시간도 찾아야 했고, 왜 이 엄마는 18년 전 딸을 그렇게 팔아먹었을까. 한 인간 혹은 자기 자식을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 그런 고민이 나온 파트 1 이후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 18년 채우기 위해 대본에 내가 나오지 않는 부분에 나온 소스도 짜깁기하고, 그걸로 얼개를 짜고, 조각상을 만들면서 정미희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만들어갔다.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송혜교한테 충격받은 그날 그 장면
▷ 파트 1과 파트 2의 정미희는 처한 상황만큼이나 외형적인 모습도 달라졌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인과응보를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그렇게 한 사람이 18년 후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모습에 편차가 생기게끔 하고 싶었다. '이렇게 사는 게 나에게 의미가 있나?'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깊이 갖고 싶었다.
그래서 정서는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몸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물기를 다 빼려고 했다. 부러뜨리면 부러질 거 같고, 아주 마른걸레마냥. 그래서 7㎏ 정도 빼고, 이걸 8~9개월을 유지했다. 되게 지독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다 내 만족이다. 작품과 역할을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다는 만족감. 그래서 되게 힘들었지만, 되게 행복했다. ▷ 개인적으로 정미희의 결말에 대해 만족하나? 그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라 보나? 만족한다. 미희가 동은에게 그렇게 강조하던 핏줄이 동은을 너무나 힘들고 괴롭게 했다. 방송으로 보면서도 내가 동은이라면 저 여자를 찢어 죽인다 한들 아픔이 없어질까 싶었다. 작가님께서 핏줄이란 부분을 잘 이용해서, 그것도 동은의 인성을 바탕으로 나이스하게 마무리하신 것 같다. 동은이는 멋진 친구니까.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 동은의 집에서 동은과 다투다가 집에 불을 내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동은의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오는데, 시청자뿐 아니라 배우들 역시 그 장면을 인상 깊은 장면으로 꼽는다. 그 지점이 동은과 미희의 클라이맥스다. 동은이 거의 무너져서 다 해체되는 수준으로 절규하게 되는 신이었다. 혜교씨가 그렇게 울부짖는 장면은 어느 드라마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정미희로서 인생을 갈아 넣고 엄마로서 동은에게 모든 걸 쏟아냈는데 동은이 싹 다 가져가서 나한테 다시 던져줬다. 내가 무언가를 했을 때 혜교씨가 안 받아주면 끝나는 거다. 근데 내가 하니까 날 아주 강렬하게 바라보면서 집중하게 해줬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혜교씨는 마치 아주 깜깜한 숲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혼자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힘이 나에게 오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잘 받아낼 수 있을지 생각했다. 배우로서 겁이 났다. 내가 먼저 찍은 후 혜교씨 신으로 넘어갔을 때,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은으로서의 인생을 거기다 다 쏟아냈다. 혜교씨 공이 크다. ▷ 서로 합이 잘 맞았고, 그렇기에 명장면이 탄생한 것 같다. 송혜교 배우한테 충격을 받은 날이었다. '저 사람 뭐지?' '왜 이렇게 잘하지?'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내가 되게 멋진 배우를 만났구나 싶었다. 행복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합이 잘 맞을 수 있나 싶었다. 혜교씨의 배려가 많이 있었다. 내가 낯선 연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그걸 기다려주고, 배려해주고, 싹 가져가서 자기 걸로 만들어서 쏟아냈다. 나한테는 아주 멋진 연기를 한 날로 아직도 행복하게 기억되고 있다.(웃음)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