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이 사절한 여자들, 어떻게 '차별의 벽' 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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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YWCA 성평등 미디어 아카데미 ①

젠더 관점으로 짚는 예능 10년…달라진 여성들
"부정적 인식이 리스크" 방송계 여성 기피 현상
고정관념·차별·성적 대상화·도구적 이용 만연하지만…
2015년 이후 꽃 피운 여성 예능 '개별적 인간'에 주목

"시청자가 가진 부정적 인식의 허들을 넘어야 여자를 데리고 방송을 한다. 그럴 정도로 가치 있는 여자 연예인이 있느냐는 문제다. 여자가 그걸 뚫고 나오려면 이효리의 스타성과 유재석의 인성을 가지지 않은 이상 어렵다."

8년 전, 한 베테랑 예능 작가가 전한 말이다. '왜 예능에는 여성이 쓰이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이니 당시 방송계의 보편적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능에서 여성 방송인이란 프로그램의 '리스크'였다. 캠핑이나 여행을 가서 맨 얼굴을 드러내면 남성 출연자에겐 귀엽고 털털하단 긍정 반응이 나오지만 여성 출연자에겐 자기관리 부족이라며 부정적 외모 품평이 쇄도하는 식이다.

10년 전 예능 지형도를 살펴보면 여성 중심의 예능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방송 3사 연예대상은 남성 방송인들만의 잔치였다. 유재석·강호동·신동엽·김구라 등 중년 남성 방송인들이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 가고 있을 때, 그들과 함께 데뷔했거나 활동했던 중년 여성 방송인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지난 10년 동안 여성 방송인들은 어떻게 두터운 '비호감'과 '차별'의 벽을 넘어섰을까. 그 변화의 물결은 어떤 결과로 나타났을까.

지난 21일 서울 중구 서울YWCA에서 열린 '성평등 미디어 아카데미'에는 '괜찮지 않습니다'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을 집필한 최지은 작가의 강의가 열렸다. 방송작가·대중문화 기자 경력을 10년 이상 가진 최 작가는 서울YWCA 보고서를 바탕으로, 지난 10년 간 예능에서 나타난 여성들의 모습을 분석했다. 고정관념과 차별, 성적 대상화, 도구적 이용은 여전하지만 그 작은 가능성의 틈을 뚫고 여성들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나이 많고 똑똑한 여성 기피…홍일점·로맨스는 'OK'

KBS, SBS 제공KBS, SBS 제공여성 방송인에 대한 유구한 '딜레마'는 아주 본질적인 부분이다. 시청자들에게 너무 쉽게 거슬리고, 그러니 제작진은 쉽게 배제 가능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포지션에 이들을 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최 작가는 "남자 방송인들의 권위는 나이가 들면 드는대로 유지되고, 젊으면 젊은대로 인기를 누린다. 그들은 대개 유리한 입장에 서있다. 특히 '가장'이란 프리미엄으로 칭찬을 받는다"며 "그런데 여자 방송인에 대해선 어리고, 똑똑하지 않은 사람을 좋아한다. 나이 많은 여성이 똑똑하게 굴면 거부감을 느낀다. 결국 제작진은 여성을 예능에 과감하게 넣지 않고 여성은 소수에 불과하게 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어떤 모임이든 여성이 17% 이상 차지하면 남자는 절반이라고 느낀다는 통계가 있다. 실제보다 너무 많다고 느끼고,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질적이고, 반갑지 않고, 꺼려지는 것"이라며 "여성이 1명이나 2명이면 '개별적 인간'보다는 '여성 대 여성'으로 비교 당하거나 과소 대표된다. 때문에 여성을 넣을 거면 반 이상으로 구성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예능 속 젊은 여성은 사회가 부여한 이상적 여성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쉬운 대체재로 소비된다. SBS '골목식당'이 대표적 사례다.

최 작가는 "당시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여성 막내, 즉 홍일점은 배우 조보아, 정인선씨가 했다. 조보아씨는 너무 밝고 싹싹하고,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하는 게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한국 사회가 젊은 여자들에게 가장 바라는 모습이었다"라고 했다.

이어 "그런데 정인선씨는 중년 남성 진행자인 백종원, 김성주씨 사이에서 자기 생각도 말하고 싶어하고, 캐릭터를 드러내고 싶어하더라. 하지만 두 분이 잘 안 받아주면서 방송 보는 게 불편해졌다. 보통 젊은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라며 "당시 정인선씨가 이에 반응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하지도 않은 말로 애교 자막을 써서 어린 티를 내는 캐릭터로 연출을 했다. 그런 역할 수행이 요구되는 거고, 방송을 통해 왜곡이 발생한다. 만약 주요 진행자와 맞지 않으면 '막내 역할'을 수행하는 출연자만 바꾸면 되니 대체하기도 쉽다"라고 지적했다.

지금보다 여성이 희박했던 10년 전에도 유일하게 남녀 동수를 이룬 예능이 있었다. 바로 짝짓기 예능이다. 로맨스에 중독된 예능들은 종종 육아 프로그램에서조차 남녀의 고정된 성역할을 전시하고, 아동 출연자 인권은 뒷전이다. 얼핏 '아빠들의 육아'를 조명해 성평등할 것 같은 KBS 2TV '슈퍼맨이 돌아왔다'도 이런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최 작가는 "아들에게 '남자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자막으로 부추긴다. 아들은 남자답게 키운다고 칭찬하면서도 딸은 어떻게 키워야 될 지 모르겠다는 양육자도 등장한다. 아이를 개별성을 가진 존재로 보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딸이라 어렵다거나 조심스럽다는 건 고정관념"이라고 선을 그었다.

또 "어린 남녀 아이들이 만나서 노는 걸 두고, 로맨스 드라마 BGM을 깔면서 마치 로맨스의 시작처럼 연출을 하는 것 자체가 아이들을 모욕하는 행동이다. 이 아이들에겐 어떠한 의도도 없는데 어른들이 이상한 필터를 씌워서, 손을 잡으면 자기들끼리 소비하면서 설레하는 식이다. 어느 연령 이상 아이들에게는 상대 동의 없이 손을 잡거나 하는 신체접촉은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어떤 어른도 그런 영역에 대해선 책임을 질 수 없지 않나"라고 비판했다.

이밖에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아이돌 예능 프로그램이 갓 스물 된 여성 아이돌에게 '섹시 댄스'를 종용하며 성적 대상화에 열심인가하면, 다수 코미디 프로그램은 여성을 포함해 외국인, 한부모 가정 등 약자 비하와 고정관념 강화로 웃음을 유발해왔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달라진 예능들 속 여성

왼쪽부터 개그맨 김숙, 박나래, 이영자. KBS, MBC, 박종민 기자왼쪽부터 개그맨 김숙, 박나래, 이영자. KBS, MBC, 박종민 기자그런데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나면서 사회 변화에 가장 민감한 미디어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한국 사회가 여성 '개별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방송 외 영역에서 이어진 팟캐스트 등 중년 여성 방송인들의 콘텐츠가 주목 받았다. 김숙은 성별 반전을 이뤄낸 '가모장숙' 캐릭터로 뜨겁게 호응 받았고, '김생민의 영수증'은 송은이의 기획력을 증명했다. 물론 남성 출연자 김생민의 성추행 논란으로 씁쓸하게 마무리됐지만. '셀럽파이브'로 김신영과 안영미가 재조명 받았고, 이영자는 '전지적 참견 시점'으로 또 다른 전성기를 열었다. 박나래는 '나 혼자 산다'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여성 방송인들의 활약은 이영자, 김숙, 박나래 등의 연예대상 수상까지 이어졌다.  
 
최 작가는 "이 무렵부터 시청자들이 나이 들고 똑똑한 여자를 싫어한다는 편견이 깨지기 시작했다. 한물 가거나 재미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실제로 본인들이 증명을 했다. '어머니'나 '아내' 포지션이 아니면 방송에서 이야기할 '떡밥'이 없지만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방송에 새로운 아이템이 필요할 때 이런 재능이 발휘가 됐다. 여성 방송인들의 캐릭터가 다양해졌고 커리어도 반등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여성 스포츠 또는 팀 예능도 활짝 꽃 피웠다. 김민경의 천재적 운동 재능을 발견한 '오늘부터 운동뚱'부터 '골 때리는 그녀들' '노는 언니'까지, 이 예능들은 여성들의 끈끈한 우정과 의리, 대상화 되지 않고 건강하게 기능하는 '여성의 몸'과 현실적 문제들을 이야기했다.

SBS, CJENM 제공SBS, CJENM 제공무엇보다 '골 때리는 그녀들'은 중년 남성층에게 수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최 작가는 "사실 남자들은 여자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재미 없어 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미친 듯이 축구만 한다. 여자들이 섹시, 애교를 할 때보다 훨씬 뚜렷한 반응이었다. 시청자의 욕망이라는 것은 의외로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발현되고,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거다. 이로 인해 풋살하는 여자들도 늘어났다"고 했다.

'퀸덤'과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성공, 그리고 초반부터 여성 비하 논란이 발생한 '스트릿 맨 파이터'의 부진은 미디어에 또 다른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여성 시청자들의 '비호감'이 결국 프로그램 성패를 갈랐기 때문이다.

최 작가는 "'퀸덤'은 그룹 AOA가 잘되면서 기존 획일적 이미지를 보여준 걸그룹의 가능성, 그리고 대중들이, 여성들이 어떤 여성을 보고 싶어하는지 그 욕망이 바뀌는 걸 잘 반영했다"며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팀 예능으로, 다양한 여성 리더들의 캐릭터, 또 팀인 여성들이 어떻게 자기 무대를 만들어가는지 보여줬다. 이후 '스트릿 걸 파이터'로 마치 '쇼미더머니'와 '고등래퍼'가 남성 래퍼들 간 서로 유산을 전승하는 것처럼 프로그램적인 관계도 만들었다"고 평했다.

'스트릿 맨 파이터'의 부진에 대해서는 "여성팬들이 훨씬 열성적이기 때문에 '스트릿 맨 파이터'의 성공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그러나 이미 '팝핑·팝핀 논쟁'부터 제작진의 성차별 발언, MC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 멤버들 비하 발언 등 문제가 됐다. 또 전작처럼 프로 댄서나 아티스트의 아우라가 아니라 '보통 남자들'의 모습이 너무 많이 나왔다"면서 "방송사나 제작사도 상업적 타격을 입어야 결국 변화한다. 각종 실언들로 인해 기사가 쏟아지고 시청률이 나오지 않고, 여성 시청자들이 거부하니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성 간판 예능의 황금기를 이끈 기성 PD들도 여성 캐릭터들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 나영석 PD는 일찌감치 '삼시세끼' '꽃보다' '윤식당' 시리즈에 여성 배우들을 출연 시켰고, MZ 스타들이 모인 '뿅뿅 지구오락실'은 유의미한 반응을 얻었다.

최 작가는 "나영석 PD는 예능을 굉장히 많이 만들면서 다른 제작자들보다 빨리 여자를 썼다. 상업적 감각이 뛰어나다. '뿅뿅 지구오락실'도 예능에서 검증된 스타들은 아니었지만 MZ세대 연예인들이 옛날 오락을 하는 포맷이 '신서유기'와 비슷했다. 그런데 그 넷의 관계가 너무 보기가 편하고 즐거웠다. 편하게 웃고 싶은 예능의 의도에 굉장히 충실했던 프로그램"이라고 밝혔다.

점점 웹예능 영향력이 커지는 시점, '백래시'(Backlash·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에 따른 안티 페미니즘이 한창인 한국 사회는 여전히 여성 예능이 자리잡기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2015년보다 충분히 희망적인 변화를 이뤄낸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에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최 작가는 "'자리가 있어도 쓸 여자가 없다. 재미있는 여자가 없다'고 했던 2015년과 비교하면 지금은 양적, 질적으로 나아졌다. 당시엔 '여자 중에 누가 재밌냐'라고 하면 고민하겠지만 지금은 최소 3명 이상 나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여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여기 저기 자리 잡게 된다. 우리는 저 낯선 여자가 뭘 하는지 충분히 지켜 보고,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여자'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 여자로 인해 내가 '나쁜 여자'로 보일 걱정을 내려 놓을 필요가 있다. 미디어는 세상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계속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 나눠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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