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불이 켜지는 경기도 안산의 행복나눔 무료급식소. 정성욱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새벽엔 국자 들고, 낮에는 공구함…19년째 '따뜻한 이중생활' (계속) |
"끼니 못 챙기는 어르신들이 많으니까요. 그냥 하는 거예요."지난 19일 오전 6시, 경기 안산시 본오동 한 골목길. 간판하나 없는 가게에서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풍겨왔다. 문을 열자 커다란 식탁과 밥솥, 대형 냄비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이석권(64)씨가 운영하는 '행복나눔' 무료급식소다. 이씨는 19년째 안산에서 무료급식을 하고 있다. 매일 홀몸노인이나 노숙인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 이씨가 직접 밥과 국, 반찬까지 만든다. 이날 메뉴는 된장국에 표고버섯, 오이무침. 특별한 날에는 김이 '서비스'로 나간다.
이씨의 본업은 따로 있다. 집을 수리하거나 공사하는 인테리어 사업자다. 하지만 출근 전까지는 무료급식소를 책임지는 운영자다.
경기도 안산에서 19년째 홀몸노인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는 이석권씨. 정성욱 기자"매일 새벽 4시에 나와서 밥이랑 반찬을 만들면 시간이 얼추 맞아요. 이제 오실 때가 됐는데…"이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끼이익' 소리가 나며 급식소 문이 열렸다. 허리 굽은 한 노인이 이씨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씨는 익숙하다는 듯 봉투에서 도시락통을 꺼낸 뒤 데운 쌀밥과 국을 담았다.
이씨는 노인에게 도시락통을 건네며 "오늘은 날이 추우니까 그냥 집에 계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굽은 허리를 한번 더 숙였다. 이어 폐지가 쌓인 유모차에 도시락통을 실은 뒤 천천히 이동했다.
폐지줍는 노인에게 국수 삶아주며 봉사 시작
이석권씨가 배식을 준비하고 있다. 정성욱 기자
이씨는 2004년부터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폐지줍는 노인들에게 우연히 국수를 삶아준 것이 시작이었다.
하루는 직원들과 함께 회사 공터에서 회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앞으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 지나갔다. 이씨는 노인들을 불러 세우곤 국수를 삶아줬다고 한다.
시작이 어려웠던 걸까. 이씨는 매번 노인들을 위해 국수를 삶았고, 어느새 동네에서도 입소문을 탔다. '좋은 일을 한다'며 굳이 이씨에게 인테리어 일을 맡기는 고객도 생겼다.
그렇게 시작된 봉사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는 급식소에서 밥을 하고, 오후에는 본업인 인테리어 일을 한다. 무료급식을 위해 월세를 내는 가게도 따로 얻었다. 이씨가 몸져눕지 않는 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매일 문을 연다.
'밥값'은 이씨 개인 돈과 일부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최근 코로나19에 경기침체까지 겹치며 상당수 후원이 끊겼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이씨는 "아무 생각 없이 국수를 삶았던 건데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해주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라며 "그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19년째 이러고 있다"며 농담을 던졌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타인 돕는 일은 보람"
급식소 냉장고에 붙어 있는 감사 편지. 정성욱 기자이처럼 이씨는 20년 가까이 봉사를 해오면서도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매일 느끼는 작은 보람이 그나마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이씨는 "이걸 일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매일 아침마다 할 수 없다"며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게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의 마음에 동참하는 이들도 많다. 그는 "후원금뿐 아니라 쓰지 않는 물건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혼자서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너무 좋은 사람으로 포장이 돼서 큰 일"이라고 웃어보였다.
이곳에서 5년째 봉사 중인 강춘화(63)씨는 "지역에서 봉사할 곳을 찾다가 추천을 받아 오게 됐다"며 "이씨의 한결같은 모습 때문에 지금까지도 함께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유명세를 치를 때도 있다. 재산이 많다거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 무료급식소를 운영한다는 시선이다. 이씨는 "돈이 많은 줄 알고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도 있고, 정치를 하려고 저런다는 손가락질도 있었다"며 "다행히 정치인처럼 잘 생기지는 않아서 더이상 오해는 받지 않는다"라고 웃으며 받아쳤다.
"내년 20년째…동네 어르신들과 잔치하고 싶어"
19일 새벽 이씨가 노인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정성욱 기자이른 새벽부터 급식소를 찾아온 발길은 오전 8시가 돼서야 끊겼다. 이날 이씨가 쌀밥을 담은 도시락통은 30여개. 이씨는 "요즘 날이 추워서 그런지 찾아오는 어르신들이 많이 줄었다"며 "노숙인들은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됐는데 어디서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무료급식소를 운영한 지 20년째가 되는 내년에는 동네 노인들과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내년이면 국수를 삶은 지도 20년째인데 동네 어르신들 모셔놓고 잔치를 하고 싶다"며 "한동안 뜸했던 분들은 아직 건강한지, 평소 쑥스러워서 찾아오지 못한 어르신들은 없는지 궁금하다. 내년엔 모두 모여서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