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핼러윈 안전 우려 정보보고서를 참사 이후 삭제한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용산경찰서 전 정보계장이 숨진 채 발견된 가운데, 사망 원인을 두고 여러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선 '강압 수사' 의혹도 제기되지만, 아직 해당 계장에 대한 소환 통보나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쉽게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해당 계장은 보고서를 삭제하도록 직원을 회유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러한 그의 행동이 독단적으로 이뤄지긴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계장을 넘어 상관인 용산서 정보과장 등 상관의 지시가 일종의 압박감을 준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그보다 더 윗선인 서울경찰청 정보부장까지, 경찰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향방이 더욱 주목되고 있다.
11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이날 숨진 채 발견된 용산서 전 정보계장인 정모(55) 경감은 '안전 우려' 보고서를 삭제하도록 회유를 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정 경감은 다른 직원을 시켜 정보보고서를 작성한 정보관의 업무용 PC에서 문건을 삭제하고 이 과정에서 직원들을 회유·종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수본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증거인멸·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정 경감을 입건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해당 문건은 핼러윈을 앞둔 지난달 26일 용산서 정보관 A씨가 작성한 '이태원 핼러윈 축제 공공안녕 위험 분석' 보고서다. '이태원 해밀톤 호텔에서 이태원소방서 사이 구간 많은 인파로 보행자 도로 난입, 사고 발생 우려', '방역 수칙 해제 후 첫 핼러윈 축제인 만큼 많은 인파 운집될 것으로 예상'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 보고서는 서울청 첩보관리시스템에 등록됐다가 3일 후 삭제됐다. 경찰 내부 시스템상 등록된 정보보고서는 72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삭제된다. 경찰관이 수집한 정보가 이슈 발생 시점이 지나 불필요해지면 정보를 폐기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서다.
그런데 정보관 A씨가 사용하던 컴퓨터에는 원본 보고서가 남아 있었다. 이번 삭제 논란은 이 원본 보고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해당 보고서는 지난 2일 삭제됐다. 이날은 경찰 특별수사본부가 1차 압수수색에 나선 날이기도 하다.
쟁점은 해당 원본 보고서 삭제 및 종용 지시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부분이다. 사망한 정 경감이 이 역할을 수행했지만, 지시는 그 '윗선'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직속 상관인 용산서 정보과장, 그보다 윗선인 서울청 정보부장이 이른바 '몸통'으로 지목되는 셈이다.
이를 두고 용산서 정보과장과 서울청 정보부장의 증언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정보과장의 경우 특정한 누구에게 삭제를 지시한 게 아니라 "직원 전체를 상대로 '관련 법 규정대로 하자'고 말했다"는 입장이다. 서울청 첩보관리시스템에 보고된 정보보고와 별도로 컴퓨터에 저장된 보고서 원본은 '필요가 없어지는 시점'에 자체 삭제하는 게 규정상 원칙인 점을 해명으로 내세우는 셈이다.
게다가 해당 과장은 서울청 정보부장의 지시를 근거로 든 것으로 전해졌다. 박성민 서울청 정보부장은 참사 직후 용산서 정보과장 등 서울 시내 31개 경찰서 정보과장이 참여한 단체 대화방에서 "정보 보고서를 규정대로 일괄 삭제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이 지시를 받아 보고서 삭제를 이행했다는 진술이다.
해당 지시를 내린 박 부장 역시 사안이 논란이 되자 '규정에 따른 지시'라는 해명을 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사태가 커지자 윗선의 '서로 책임 떠넘기기'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다만 용산서 정보과장과 서울청 정보부장의 지시에는 다소 간극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서울청 정보부장의 경우 보고서를 특정하지 않았지만, 용산서 정보과장의 경우 '핼러윈 안전 우려 정보보고서' 삭제에 유독 집중했다는 정황이 일부 포착되기 떄문이다. A씨의 경우 정보과장의 삭제 지시에 '부당한 지시'라며 맞섰지만, 결국 보고서는 삭제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를 종합하면 정 경감의 사망 배경을 밝히기 위해선 정보과장의 지시가 어떤 식으로 이뤄졌고 의도는 무엇인지, 박 부장의 지시는 정당했는지 등 '윗선' 지시에 대한 좀 더 명확한 진상규명이 돼야 한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경찰 관계자는 "윗선 지시가 아니고서야 정 경감이 독단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연말 승진 인사철이 다가온다는 점에서 향후 문제가 될 소지를 애초에 없애려는 윗선의 의도가 이번 삭제 논란에 숨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도 나온다. 핼러윈 안전 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고도 여기에 대응하지 못했다면 참사 부실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에, 보고서를 삭제하면서 아예 근거 자체를 없애려는 행보가 아니었느냐는 추측이다.
한편 정 경감은 전날(10일) 일부 동료에게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기발령 조치됐으나, 이날 출근지인 서울경찰청으로 오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유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특수본은 정씨에 대한 수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하고 용산서 정보과장과 박성민 부장에 대해서는 수사를 이어갈 방침이다. 관련자 추가 조사와 압수물 분석이 완료되는 대로 이들을 소환해 조사할 계획이다.
특수본은 이날 정씨 사망과 관련해 "경찰공무원으로서 국가에 헌신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특수본은 이태원 사고 수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이날 저녁 정씨 빈소를 찾은 뒤 기자들을 만나 "너무 갑작스러운 이런 비통한 소식을 접하고 정말 누구보다 안타까운 마음"이라며 "경찰청 차원에서 30여 년 경찰관으로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신 그 삶이 정당하게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