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서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의 모습. 픽사베이 "정부는 오늘부터 사고 수습이 일단락될 때까지 국가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본 건 사고의 수습과 후속 조치에 두겠다" (10월 30일, 윤석열 대통령 대국민 담화)할로윈(핼러윈)을 앞둔 지난달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는 한때 1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고, 압사로 사망하는 다중밀집사고가 벌어졌다. 사망자 156명, 부상자 191명에 이르는 참사였다. 정부는 지난 5일 자정(24시)까지를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했고, 사고 다음 날부터 대중문화예술계는 줄줄이 멈췄다.
정부나 지자체가 주최·주관하는 행사가 가장 빨리 취소됐다. 10월 마지막 주와 11월 첫째 주 컴백을 앞둔 가수들은 앨범 발매 일정을 잠정 연기했고, 예정된 쇼케이스와 콘서트 등이 적지 않게 취소되거나 늦춰졌다. 코로나19 이후 대면 행사로 계획됐던 시상식의 레드카펫 행사와 실시간 생중계도 취소됐다. 할로윈을 콘셉트로 한 행사와 콘텐츠가 자취를 감춘 것은 물론이다. TV 예능 대다수와 일부 드라마가 결방됐다.
사단법인 대한가수협회 이자연 회장은 "국가 애도기간(10월 30일~11월 5일)의 엄중한 상황을 고려하여, 협회 차원 각종 행사와 방송을 전면 중단하고,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 동참하겠다"라고 밝혔다. 대한가수협회가 여는 공연과 행사에 관해서는 "안전관리에 더욱 만전을 기하겠다"라고 강조했다.
'금지'는 아니지만, 비난 여론 생길까 촉각 곤두세워
'국가 애도기간'은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 등의 '강제'는 아니다. 드물지만 예정된 공연과 행사를 진행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직접 선포했기에 단순한 권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고기호 인넥스트트렌드 총괄이사는 CBS노컷뉴스에 "국가 애도기간에 나라나 지자체에서 하는 공연과 행사가 연기·취소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지금도 대중음악 공연을 아예 못 하게 한 것이 아니다. '안전하게 하라'라고 한다. 그런데 음악 공연은 대부분 가수 이름이 걸리기 때문에, 비난 여론이 생기면 대중가수들 입장에서 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정부가 11월 5일까지 국가애도기간으로 지정한 가운데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 인근 상점에 임시휴업 안내문이 붙어 있다. 류영주 기자 대부분의 공연은 최소 수 개월, 길게는 1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들여 준비한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둔 11~12월은 대목이고, 연말 분위기에 맞춰 즐겁고 신나는 콘셉트로 진행하는 공연도 상당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가 벌어졌기에 기존에 기획한 공연을 그대로 여는 것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긴다.
고 이사는 "한 해를 정리하는 공연은 신나는 분위기로 기획된 것도 꽤 있다. 이미 큐시트가 그렇게 짜여있는데 공연 방향성을 원래대로 가기 힘들어 취소하기도 한다. 공연 취소엔 큰 결심이 필요하다. 대관료, 수수료 등 비용은 물론 공연을 위한 제작물, 거기에 들어간 시간과 노력을 합하면 정말 큰 손실이 입는데도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는다"라며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연장은 (이번처럼) 특수한 사례에 관해서는 일부 보전 등 다양한 방식을 고민했으면 좋겠다"라고 바랐다.
갓 컴백했거나 컴백을 앞둔 가수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 관계자 A씨는 "앨범, 방송, 공연을 접는다는 것은 비용과 직결된다. (장소) 대관비가 걸려 있고 새로 잡으려면 새로운 비용이 추가된다. 최소 몇천만 원에서 크게는 수억 원까지도 감내해야 한다. 잘된 공연은 티켓 수익으로 보전되기도 하지만, 그게 아닌 경우가 대다수"라고 설명했다.
아직 인지도가 낮거나 충분히 탄탄한 팬층을 구축하지 못한 신인의 경우 더 치명적이다. A씨는 "긴 시간 유통사와 논의해 최적의 발매 날짜를 잡은 건데, 밀리면 되는 날짜에 내야 한다. 또, (기획사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한다고 해도 나갈 방송이 없다"라며 "국가 애도기간이 5일까지라고는 하나, 이게 장기화한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모든 연말 플랜을 다시 짜야 한다. 대체할 방법이 없다"라고 토로했다.
A씨는 "정부에서 추모 기간을 공식화했기에 더 큰 목소리를 못 내는 게 있다. 그때까지는 조금 자중하자고 메시지를 던지니까, 더더욱 눈치가 보인다. 그게 잘못은 아니지만 업계에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공연하기도 애도의 방식일 수 있어"
그러나 '국가 애도기간'으로 대표되는 중단과 침묵만이 애도의 방식일 수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부 예술인들은 소셜미디어 글로 공연과 창작의 의미를 묻고, '공연하기'를 택했다고 공개했다.
홍대 한잔의 룰루랄라에서 '45일간의 인디여행'을 비롯한 수많은 공연을 기획하고 최근에는 '격조콘'을 연 이성민 대표는 "애도의 마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 깊이와 표현방식도 저마다 다를 것"이라고 썼다. 또한 "공연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나. 공연을 멈추지 말자"고도 했다.
지난 3일 서울 홍대 벨로주에서 열린 '내 가수의 애창곡 i' 공연 포스터. 박정용 대표 페이스북드랙 아티스트 허리케인 김치(히지 양)는 소셜미디어에 "저는 전업 예술인이고 공연자입니다. 공연 하나는 자진하여 취소하였고, 다른 하나는 서울시의 권고 하에 취소되어 이번 달 제 수입의 70%가 사라졌습니다. 예술가와 공연인의 활동은 '노는 것'이나 '애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직업이고 생계 수단"이라며 "공연하는 것과 창작하는 것은 예술인들이 애도하고 힘든 상황을 견뎌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라고 썼다.
지난 3일 서울 홍대 벨로주에서 열린 '내 가수의 애창곡 i'는 '공연하기'를 택하고 실행한 예다. 생각의 여름, 빅베이비드라이버, 김사월이 자신의 애창곡을 선곡해 관객에게 들려주었다. 이번 공연을 기획한 벨로주 박정용 대표는 개최에 앞서 진행 여부를 두고 참여 음악가들과 논의한 끝에 '공연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박 대표는 지난 2일 페이스북 글을 통해 "모든 공연이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 다르겠죠. 공공에서 일방적으로 취소한 공연들 말고 실제 기획자나 음악가 스스로 추모의 의미로 연기하거나 취소한 공연도 많을 것"이라면서도 "본 공연은 충분히 지금 시점에서 함께 필요한 추모와 위로를 나눌 수 있는 공연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이 공연은 강행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공연을 앞두고 생각의 여름이 소셜미디어에 적은 글은 널리 회자하기도 했다. 그는 "공연이 업인 이들에게는 공연하지 않기뿐 아니라 공연하기도 애도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하기로 했던 레퍼토리를 다시 생각하고 매만져봅니다. 무슨 이야기를 관객에게 할까 한 번 더 생각하여 봅니다. 그것이 제가 선택한 방식입니다. 모두가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전했다.
3일 '내 가수의 애창곡 i' 공연과 6일 맞배집 '사랑과 존경을 담아'를 준비하고 있던 김사월도 두 공연을 그대로 한다고 알렸다. 김사월은 "우리들의 노래를 통해서 서로를 위로하고 보살필 수 있기를 기도할게요. 희생자분들과 그의 가족, 지인들에게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라고 썼다.
'생계'로서의 예술, 그 이상을 고민하기
생각의 여름이 지난달 31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 생각의 여름 페이스북'공연하기'도 애도의 방식일 수 있다는 생각의 여름의 글, 예술가와 공연인의 활동은 직업이자 생계 수단이라는 허리케인 김치의 글은 온라인상에 널리 퍼졌다. 날선 반응도 분명히 있었으나 동의와 지지로 답하는 반응도 표면화되었다는 것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예술가는 씹다 뱉는 껌이 아닙니다. 기분 좋으라고 들러리 세워놓다가 곤란하면 쫓아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창작활동은 그 자체로 존엄하며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창작노동은 노동으로서 존엄하며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을 틀어막지 마십시오. 창작은 예술가에게 추도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허리케인 김치가 공유한 글 일부)누군가에게는 예술이 생계라는 것을 이해하는 단계에 다다르는 것을 넘어, '예술이란 무엇인가' '창작 활동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더 자유롭고 깊이 있는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한다는 시각도 있다.
김윤하 음악평론가는 "대중예술 전반에 관해 성숙한 의식이 자리 잡을 때, 예술을 하는 사람도 소비하는 사람도 의미 있게 그(애도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무조건 공연과 행사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기회를 박탈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애도나 슬픔을 어떻게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낼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우선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술인들 가운데 '내가 하는 일은 이렇게 어렵고 슬픈 일이 닥치면 멈춰야만 하는 일인가' 하는 고민을 토로하는 이들도 적지않게 만났다. 다행히도 요즘은 예술도 곧 생계라는 데 초점을 맞춰 공연 진행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반응도 나오지만, 그를 바탕으로 대중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배려와 생각이 더 뒤따랐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