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 1층에 설치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이준석 기자3일 오전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경기도청 1층 로비. 하얀 국화꽃이 수북이 쌓여 있는 제단 위에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도청 직원과 일반 추모객들은 영정사진 하나 없는 단상에 국화를 올린 뒤 '참사 희생자' 문구를 향해 묵념을 했다.
경기도청 지하주차장에 있는 분향소 안내판. 이준석 기자
다만 주차장, 외부 통로 등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희생자가 아닌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라고 적혀 있었다.
도는 지난달 31일 분향소를 차리면서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제단 문구를 '이태원 참사 사망자 합동 분향소'로 정했다. 하지만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이달 2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급하게 명칭 변경이 이뤄지다보니 인적이 드문 곳의 안내판은 미처 바꾸지 못한 것이다.
이날 분향소를 찾은 한 도민은 "사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고 참사는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는 것인데, 일련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번 상황은 참사가 맞는 것 같다"라며 "사망하신 분들도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사망했기에 희생자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랬다 저랬다'…오락가락 정부 지침에 지자체 혼란
명칭이 다른 분향소. 이준석 기자합동 분향소 명칭을 '이태원 사고 사망자'로 안내한 정부가 뒤늦게 입장을 바꿔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앞서 행정안전부는 지난달 31일 '이태원 사고 관련 지역 단위 합동분향소 설치 협조' 공문을 발송하고 분향소 표시를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로 하라고 안내했다. 또 제단 중앙에 '이태원 사고 사망자'로, 설치 장소는 시·도 청사를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사고 사망자'라는 표현에 축소나 책임 회피 의도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사고' '사망자' 표현은 권고 사항으로 '참사' '희생자' '피해자'를 사용해도 된다며 입장을 번복했다.
이에 경기도와 마찬가지로 명칭을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로 정한 안양시는 "사고를 참사로 바꾸자"는 시민들의 전화 민원과 현장 항의를 받고 2일 오후 안양역 앞과 시청에 설치한 분향소 명칭을 모두 바꿨다.
경기도 아파트 엘리베이터 광고판(왼쪽)과 부천 아파트 엘리베이터 광고판(오른쪽). 이준석 기자수원·화성·평택·광명·시흥 등도 비슷한 이유로 명칭을 변경했다. 부천도 분향소 명칭은 바꿨지만, 아파트 엘리베이터 등 외부 온라인 광고 문구는 외주업체 사정 상 변경이 늦어지고 있다.
수원시 관계자는 "온라인 안내에 적힌 명칭은 일찌감치 바꿨지만, 오프라인은 내부 조율 문제로 다소 지연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인천시와 용인·오산 등은 기존 분향소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자체가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분향소 명칭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행안부 또는 정부의 지침을 어기면 예산 등의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라는 걱정에 나 또한 결정을 내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라며 "전국의 지자체장들 역시 정부를 무서워하는 게 현실이다"고 말했다.
광주시는 경기도와 함께 선제적으로 합동분향소 명칭을 '참사 희생자'로 바꾼 바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지방정부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준 '이태원 참사'를 놓고 분명한 철학없이 일방적으로 중앙정부에 휘둘려 오락가락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책임 회피 위한 꼼수?…여전히 계속되는 논란
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희생자 추모 공간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정부가 입장을 번복했지만, 책임 회피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 이성만 의원은 2일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이번 사고를 개인들이 자기주의를 잘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냐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기 위해서, 즉 본인의 면피를 위해 이런 용어를 쓰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에 박종현 행정안전부 사회재난대응정책관(안전소통담당관)은 "재난 관련 용어는 정부 부처나 지자체 등 매우 많은 기관이 협업하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용어를 통일한 것은 아니다"라며 "희생자 표현을 써도 된다. '사고', '사망자'는 권고사항이며 (다른 표현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