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전두환 무식해" 40여년 전 옥살이 재심청구한 檢의 속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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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박종민 기자 박종민 기자
너나 할 것 없이 대통령이 폭우가 쏟아지던 밤 칼퇴했다고 흉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전직 대통령 자택 근처에서 확성기에 대고 원색적인 욕설을 내뱉어도 감옥에 가긴커녕 유튜브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입니다. 각종 자유를 억압한 계엄법이 이미 위헌이 됐으니까요. 그렇다면 계엄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그때 그 시절 국민들에 대해서는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檢이 직권으로 재심 청구한 '그때 그 사람'

구치소. 연합뉴스구치소. 연합뉴스
1980년 10월 13일 경기도의 한 구치소. 폭행죄로 복역 중인 이모(35)씨가 동료 수감자들에게 "육(영수) 여사 사망 당시 평양에서도 방송을 듣고 있었을 텐데 총소리 듣고 즉각 남침했으면 통일했을 것인데 아쉽다"고 한마디 던집니다. 동료 김모씨가 "이북에는 흑백 테레비도 없을 것"이라고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이씨는 "이북에는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있다"고 응수합니다.

그날 이후에도 이씨는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으면서 이북에 갈 때 헬리콥타를 타고 가서 올 때는 이북 자가용을 타고 판문점에 내려 다시 자기 자가용을 타고 오면서 이북에도 배울 점이 많다고 했다", "북한은 고속도로가 평양에서 원산까지 연결되어 있어 산업면이 남한보다 잘 되어 있다"고 하는 등 북한 찬양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동료들이 듣는둥마는둥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신이 난 걸까요? 이씨는 "현 정부 전두환씨는 너무 무식하다"고까지 내뱉어버립니다. 국가원수 모독(?)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북한에 흑백 테레비도 없을 거라며 이씨에게 면박을 줬던 동료 김씨가 당국에 이씨를 찌른 모양입니다. 결국 이씨는 국가보안법과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군사법원 법정에 서게 됩니다.  
1981. 1. 22 수도군단계엄보통군법회의 81보군형 제3호 판결
재판장(대령): 피고인은 북괴가 대한민국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점을 알면서 위와 같이 발설했다. 반국가단체 및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 …김씨 외 10여명이 있는 자리에서 헌법개정에 관하여 서로 얘기하던 중 피고인은 "현정부 전두환씨는 너무 무식하다"라고 발설하여 현직 국가원수를 모독비방한 것이다.
 이씨는 이렇게 징역 2년 및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습니다. 이씨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고, 같은해 4월 서울고등법원은 "원심의 양형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며 징역 1년 및 자격정지 1년으로 감경합니다.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습니다.


"시절이 많이 지났다"는 檢의 반성…화답한 法


대법원. 연합뉴스대법원. 연합뉴스
대통령 흉 좀 봤다고 징역형이라니, 오늘날 기준으로는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계엄법이 우리의 어두운 역사 속 이야기가 된 지 오래. 하지만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 청구에 나서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한통속이 돼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이제 다들 알지만, 이를 하나하나 바로잡고 인정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니까요. 서울고등검찰청은 이씨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최근 법무부는 제주 4·3사건 당시 일반재판으로 옥살이한 피해자들에 대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조치했고, 국회에서는 지난해 4·3 특별법을 통과시켜 군사재판에서 형을 받은 수형인에 대해 검찰이 재심을 청구하도록 했습니다. 엄혹했던 독재 시절 제기능을 못했던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늦게나마 조금씩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는 과정인 겁니다. 이번 서울고검의 재심 청구도 이같은 역사의 흐름과 무관치 않다고 보여집니다.  

검찰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에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은 두 개의 범죄(국보법·계엄법 위반)에 대한 하나의 형을 선고한 것이라서 각각의 범죄에 대해 다시 형을 정해야 한다"며 "형을 다시 정하려고 보니, 시절이 많이 지났고 참작할 이유가 많이 생겼다"고 재심 청구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계엄법이 법적 효력을 잃게 되면서 두 가지 범죄에 대해 1년형을 선고받은 이씨의 경우, 8개월이든 6개월이든 1년보다 적은 형으로 감경받는 것이 자연스럽겠죠?

서울고법도 이에 화답했습니다. 다만, 새로운 양형에 한해서만 심리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2022. 6. 23 서울고등법원 제5형사부 판결
재심청구인(검사)은 경합범 관계에 있는 국가보안법 위반, 계엄법위반의 각 공소사실 중 계엄법위반의 점에 대해서만 재심사유를 주장하면서 재심청구를 하여 그 재심사유가 인정되었고, 다만 이 법원은 재심대상판결 전부가 불가분의 판결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재심대상판결 전부에 대하여 재심개시결정을 하였다. …결국 이 사건 계엄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그 내용도 영장주의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 위배되며, 표현의 자유·학문의 자유 등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므로… 피고인에게 적용된 이 사건 계엄포고는 위헌·위법하여 무효이다.
위헌결정이 난 법령을 적용받아 공소가 제기된 사건이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상 이씨는 무죄를 선고받게 된 겁니다.


위헌 아닌 국보법…이씨는 왜 무죄일까?

연합뉴스연합뉴스
그럼 이제 양형을 다시 정해야 합니다. 대통령 흉은 마음껏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할 표현의 자유는 국가보안법이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으니까요. 이 부분에 대한 이씨의 죄는 아직 남아있는 겁니다. 이에 대해 서울고법은 이씨에 대해 형을 면제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15일 국가보안법 위헌 여부를 놓고 여덟번째 공개 변론을 듣습니다)
2022. 6. 23 서울고등법원 제5형사부 판결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찬양하였다고 보기 위해서는 그 행위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피고인의 이 부분 각 행위 내용은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되는 정도가 매우 미약하다. 이러한 정상을 비롯해 각 행위 판결이 확정된 원심 판시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죄와 동시에 판결을 받았을 경우와의 형평 등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여러 양형조건을 참작하여 주문과 같이 형을 면제한다.
폭행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 받고 수감 중이었던 이씨. 전직 대통령한테 '개○○'라고 하는 오늘날에는 국가원수를 향해 존칭을 붙여가며 '무식하다'고 한 발언과 폭행의 죄 사이 형평을 다시 맞춰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아, 의아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40여년이 지난 사건인 데다 피고인 이씨는 이미 사망한 지 오래입니다. 당사자도 아니고 수사 인력도 부족한데 검찰이 굳이 나서서 재심을 청구한 이유가 뭘까요?  

아무리 사소한 기록일지라도 법원의 판결문은 언젠가, 누군가 다시 들춰보게 됩니다. 기자가 1981년 어느 이름 없는 직장인의 군사법원 판결문을 구태여 찾아봤듯이요. 그리고 혹시 알까요, 40년 전에 오늘날과 같은 자유를 상상할 수 없었듯이 40년 후 세상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때 혹시 누군가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려고 할 때,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았던 2022년 검찰의 재심 청구와 법원의 판결문이 우리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겠지요. 검찰이 과거 잘못 판단 내린 사건들을 찾아내고 무의미해보이는 재심 청구를 계속 이어가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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